세종특별자치시 ()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한민국의 중부에 위치한 특별자치시.
정의
대한민국의 중부에 위치한 특별자치시.
개관

2012년 7월 1일에 충청남도 연기군을 폐지하면서 인근의 충청북도 청원군과 충청남도 공주시 일부를 병합하여 우리나라에서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출범하였다. 동쪽은 충청북도 청주시, 서쪽은 충청남도 공주시, 남쪽은 대전광역시, 북쪽은 충청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464.90㎢이고, 인구는 30만 6476명(2018년 현재)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된 구역은 72.91㎢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3개 행정동(14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세종특별자치시 보람동에 있다.

자연환경

시의 북부에 자리한 조치원읍의 북쪽으로 차령산맥의 지맥이 통과하지만, 운주산(460m)이나 국사봉(403m) 등을 제외하고는 오랜 침식작용을 받은 저산성 구릉지가 대부분이다. 대부분 지역이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지는 목초지나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이들 산지 사이로 금남면에서 발원한 삼성천이 북서쪽으로 흐르다가 괴화산 근처에서 금강에 합류한다. 전의면에서 발원한 조천은 남동류하여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흘러내려오는 미호천과 합쳐진 후 남류하다가 합강정에서 금강으로 유입한다.

금강은 시의 남단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공주시로 흘러간다. 미호천과 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금강 유역에도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함께 대부분의 농경지는 사라지고 시가지가 들어섰다.

기후는 한서의 차가 큰 대륙성 기후의 특징이 나타난다. 연평균기온 13.1℃, 1월 평균기온 –2.6℃, 8월 평균기온 27.8℃, 연 강수량 1,120.2㎜를 기록하였다. 강수량은 연도별 기복이 다소 큰 편으로 2010년부터 2012년까지는 1,400㎜를 상회하였다.

역사

인접한 공주시 석장동에서 1964년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어 구석기를 포함한 선사시대의 유적권 내에 들어간다. 이곳은 백제 초기부터 백제 강역에 속하였다. 376년(근구수왕 2)에는 적현성(赤峴城)이었고 그 뒤 두잉지현(豆仍只縣)이 되었으며, 백제 말에는 주류성(周留城)이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에 연기현(燕岐縣)으로 고치고 연산군(燕山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지금의 전의면 일대는 백제 때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당나라가 백제를 친 다음 구지(久遲)로 고치고 동명주(東明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같은 해에 금지(金池)로 고쳤으며 대록군(大麓郡: 현 천안시 목천읍)의 영현으로 삼았다.

전동면의 운주산성(雲住山城)은 신라 때 전주부(全州府)가 있었던 곳이다. 940년(태조 23)에 금지현을 전의현(全義縣)으로 고치고 청주에 소속되었다. 연기현은 1018년(현종 9)에 청주에 영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감무를 임명하였으며 뒤에는 목주감무(木州監務)를 겸하게 하였다.

1291년(충렬왕 17)에 거란이 침입하자 원나라 세조에게 군대를 요청하고 한희유(韓希愈)·김흔(金忻) 등이 나가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거란족을 무찔렀다. 그 전공을 기념하여 정좌산은 원수산(元帥山)이라 불렀다.

고려 말의 전서(典書) 임난수(林蘭秀)는 고려가 무너지자 삼기촌(三岐村)에 은둔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에 세종은 그의 정절을 기려 삼기촌 나성(羅城)에 신장(申檣)이 쓴 ‘임씨가묘(林氏家廟)’라는 사액을 내리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문으로 신도비를 세웠다.

1395년(태조 4)에는 전의현에 처음으로 감무가 임명되었다. 1397년에 목주감무와 분리하여 연기현에도 감무가 임명되었다. 1414년(태종 14) 전의현과 연기현을 합쳐 전기(全岐)라고 하였다가 1416년에 다시 연기현과 전의현을 분리하여 각각 현감을 두었다.

1680년(숙종 6)에 연기현은 문의(文義)에 병합되었다가 1685년에 분리·복구되었다. 1895년에 공주부 연기군과 전의군으로 개편되었고 1896년에 충청남도 연기군과 전의군이 되었다. 1914년에 연기군은 전의군 전지역과 공주군 일부를 편입하여 7개 면을 두었다.

1931년에 조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여 1읍 6면이 되었다. 1940년 7월에 서면의 반암·신동·내창·동리 등 4개 리를 조치원읍에 편입시켰다. 1973년 7월 1일에 공주군 장기면 나성리·송원리가 남면에, 반포면 도암리·성덕리·영곡리가 금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11월 1일에는 전의면에 소정(小井)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7년 1월 1일에 전동면의 신방리·영당리·양곡리·달전리·금사리·다방리가 전의면에 편입되었고, 7월 1일에는 서면에 봉암(鳳巖)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95년 1월 1일에 소정출장소가 면으로 승격하였다. 3월 1일에 동면 갈산리가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으로, 청원군 강외면 심중리는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다. 7월 1일에는 동면 문주리 일부가 서면 봉암리에 편입되었다.

2002년에 치러진 제17대 대선에서 서울에 입지한 국가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국가경쟁력을 제고하고 지역균형발전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2003년에 정부에서는 「신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신행정수도 추진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고, 수도권에 입지한 행정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여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를 해소하는 동시에 국가균형발전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하여 충청권에 4곳의 신행정수도 후보지(충청북도 음성·진천권, 충청남도 천안권, 충청남도 연기·공주권, 충청남도 공주·논산권)가 가려졌으며, 최종적인 후보지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충청남도 연기·공주권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2004년 11월에 관습법상 대한민국의 수도는 600여 년간 이어져 온 서울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은 위헌 판결을 받게 되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위헌 판결을 받은 이후 후속 대책으로 2005년 3월 18일에는 신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였던 충청남도 연기군과 공주시 일대에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계획을 수립하였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신행정수도의 기능에서 수도기능은 배제하고 행정기능과 복합도시기능만을 포함하는 도시로 계획되었다.

행정기능·입법기능·사법기능의 세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어야 진정한 수도라 할 수 있지만, 행정기능만 입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행정중심복합도시는 ‘행복도시’로 약칭하여 불리기 시작하였다.

2010년 1월에는 중앙행정기능을 없애고 주거용지의 규모를 축소하는 대신 과학연구·대학·첨단녹색산업 기능을 강화하고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세종시 수정안이 발의되었다. 즉 행정도시에서 경제도시로 탈바꿈하는 계획으로 수정된 것이다.

수정안은 같은 해 6월에 국회 국토해양위원회에서 부결되었으며, 결국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 원안대로 개발이 진행되었다. 이후 2010년 12월에 「세종시 설치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공포되었다.

2012년 6월에 충청남도 연기군이 폐지되었고 2012년 7월 1일에 세종특별자치시로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연기군 전역, 공주시 의당면·장기면·반포면 일부 지역,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일부 지역이 세종특별자치시에 포함되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장군면, 연기면, 연동면, 금남면 등 4개 면과 13개 동에 걸쳐 조성되었다. 어진동에 자리한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는 36개 중앙행정기관(18개 본부, 18개 소속기관)을 비롯하여, 15개 국책연구기관이 2012년부터 이전을 시작하였다.

세종특별자치시의 명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와 엄격한 심사를 통해 2006년 12월 21일에 확정되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은 행정도시가 지니는 지리적 특성, 역사성, 상징성, 대중성, 국제성 등의 도시특성을 고려하여 명칭을 선정하였다.

세종대왕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전의면에서 나는 초수(椒水)로 눈병을 치료했다는 역사적 관련성도 있고, 세상[世]의 으뜸[宗]이라는 의미는 나라의 중심이 되고 행정의 근간임을 잘 보여주는 지명이다.

2012년 8월에 1읍(조치원읍) 9면(연기면, 연동면, 부강면, 금남면, 장군면, 연서면, 전의면, 전동면, 소정면) 14개 법정동(반곡동, 대평동, 가람동, 한솔동, 나성동, 새롬동, 다정동, 어진동, 종촌동, 고운동, 아름동, 도담동 소담동, 보람동)으로 확정되었다. 14개의 법정동은 3개의 행정동(한솔동, 아름동, 도담동)이 관할한다.

유물·유적

세종특별자치시는 다양한 문화재가 분포되어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로는 월하리의 연화사(蓮花寺)에 있는 연화사 무인명불비상 및 대좌 (보물, 1978년 지정), 연화사 칠존불비상(보물, 1978년 지정)이 있다. 또한 세종 홍판서댁(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과 연기 봉산동 향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가 지정되어 있다.

유형문화재로는 전의 비암사 극락보전(보물, 2021년 지정), 연서 효교비(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전의 비암사 삼층석탑(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남평조씨 병자일기(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부강초등학교 강당(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전의 비암사 영산회 괘불탱화(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전의 비암사 소조아미타여래좌상(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2년 지정), 류형장군 호패((柳珩將軍戶牌) 및 교지(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4년 지정), 육조대사법보단경(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4년 지정되었으나 2015년 소재지 변경으로 지정 해제됨.), 고봉화상선요(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4년 지정), 장군 영평사 목조나한상 및 복장유물 일괄(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4년 지정), 연동 황룡사(燕東黃龍寺)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4년 지정), 금남 송림사 팔상도 초본(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5년 지정), 남양홍씨 연기파종중 문서 일괄(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15년 지정), 정만익 정위필 지석 및 탁본첩(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 2020년 지정)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각궁을 제작하는 전의 궁인(세종특별자치시 무형문화재, 2012년 지정)이 지정되어있다.

이 밖에도 운주산성(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2012년 지정), 이성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2012년 지정), 금이성(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2012년 지정), 부강 남성골산성(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2012년 지정), 연동 합호서원(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2012년 지정), 금남 문절사(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2012년 지정), 장군 덕천군사우(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2012년 지정)와 같은 건축물 등이 있다.

산업·교통

조치원읍이 과거 연기군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 조성과 함께 한솔동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새로운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행정기관이 본격적으로 이전하기 전에는 10만 명에 미치지 못하였던 인구가 2012년에 10만 명을 넘어섰으며 2014년 말에는 15만 명을 상회할 정도로 인구증가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사업체수도 2012년부터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교통은 시의 조치원읍으로 경부선 철도가 관통하고, 동쪽으로는 고속철도(KTX)가 지나며, 당진영덕고속도로가 관내를 통과한다. 경부선 고속철도와 호남선 고속철도의 분기점인 오송역이 시청에서 5㎞ 거리에 있으며, 오송역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까지 간선급행버스체계(BRT)가 시행되고 있다.

시의 남북 방향으로 국도 1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국도 36호선이 각각 관통한다. 환상형으로 구축된 행정중심복합도시 내에서의 교통망은 물론 주변도시와의 교통망이 잘 발달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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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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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시대의 도시와 국토』(남영우 외, 법문사, 2014)
『세종통계연보』(세종특별자치시, 2014)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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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충남: 환경과 역사』(충청남도교육위원회, 1986)
『한국지지』총론(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한국지지』지방편Ⅱ(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충남의 맥락』(충청남도,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연기실록』(연기군, 1981)
「2014 세종특별자치시 사회조사 보고서」(세종특별자치시, 2014)
세종특별자치시(www.sejong.go.kr)
집필자
손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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