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시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여주, 이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여주, 이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동남단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동남단에 위치한 시.
개설

동쪽은 여주시, 서쪽은 용인시, 서남쪽은 충청북도 음성군, 북쪽은 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20′∼127°38′, 북위 37°03′∼37°22′에 위치한다. 면적은 461.36㎢이고, 인구는 20만 4935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4개 행정동(15개 법정동), 305개 행정리(117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이천시 중리동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의 지맥이 동북부지방을 지나고 남쪽은 차령산맥에 인접해 있어 북쪽과 서쪽은 높은 산이 발달하고 있으나 동쪽과 남쪽은 비교적 낮은 산지가 발달하고 있다.

동쪽에는 연대산(227m)이 여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서쪽에는 양각산(羊角山, 386m)·건지산(乾芝山, 411m)·소학산(巢鶴山, 309m)·봉의산(鳳儀山, 325m)·대덕산(大德山, 309m)·마옥산(磨玉山, 445m)·노고산(274m)·모룡산(174m)이 용인시·안성시와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마이산(馬耳山, 472m)·임오산(林烏山, 341m)·팔성산(八聖山, 376m)이 충청북도 음성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설봉산(雪峰山, 394m)이, 장호원쪽에는 설성산(雪城山, 291m)·백족산(白足山, 402m)·봉미산(鳳尾山, 174m)·저명산(猪鳴山, 394m) 등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는 이천의 중심 하천인 복하천(福河川)과 그 지류가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흘러 여주시로 향하다가 남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장호원에 있는 청미천(淸渼川)이 백족산을 끼고 북류하여 충청북도 음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작은 규모의 평야와 구릉지가 발달하고 있는데, 이들 평야는 땅이 기름져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토양은 충적토가 유역에 발달해 있다.

연평균기온은 10.7℃, 1월 평균기온 -5℃, 8월 평균기온 26℃로 한서의 차가 30℃를 넘는 대륙성 기후에 속한다. 연강수량은 1,218㎜이다. 서리는 10월 초순부터 내리고 이듬해 4월 초순에 끝난다.

역사

구석기 유물·유적은 발굴된 바 없으나 인접한 수원·안성·화성 등지에서 타제석기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발굴 가능성은 높다. 신석기 유물·유적이 신둔면 지석리와 장동리에서 발견되고 있으므로 이천에 이미 신석기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지석리의 고인돌과 소당산 산신제 유습은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두 나라, 노람국(怒藍國)과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이 이천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삼국이 서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하는 가운데 이천은 먼저 고구려의 남천현(南川縣)이 되었으며, 568년(진흥왕 29)에는 신라에서 남천주를 설치하면서 아울러 남천정(南川停)을 두었다.

660년(태종무열왕 7)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김인문(金仁問)이 남천정에서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 군사를 맞이했다고 전한다. 경덕왕 때 황무현(黃武縣)으로 개칭되어 한주(漢州)에 속하였다. 군내의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산성터는 대체로 이 무렵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의 역사를 증언해주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를 치러 갈 때 이천에서 진을 치게 되었다. 이 때 주민 서목(徐穆)이 도와 무사히 남천(지금의 복하천)을 건넜다고 하여 비로소 이천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어원은 ‘이섭대천(利涉大川: 강을 건너감이 이롭다.)’이라고 한다. 그 뒤 이곳을 지나는 길손은 반드시 남천이 어디이며, 서씨의 후손은 누구냐고 물었다고도 한다. 서목의 손자가 유명한 서희(徐熙)이다.

고려 목종 때 일본인 귀순자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를 이천에서 살게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1257년(고종 44)에는 영창현(永昌縣)으로 고쳐졌으며, 1389년(공양왕 1) 다시 남천현이 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는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민왕이 이천에 왔다고 하여 원적산의 정상 천덕봉이 일명 공민봉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초인 1393년(태조 2) 이천현 감무(監務)가 부임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음죽현(陰竹縣)이 경기도에 편입되었다. 이천은 이때부터 인구가 늘어나고 벼농사가 잘 되어 1444년(세종 26)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이천도호부의 호수는 1,026호, 인구는 3,898인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신립(申砬)장군이 충주에서 왜군과 대적하여 패전했는데, 그의 시신이 이천에 이르자 비로소 그 넋이 나갔다는 전설이 신둔면 수광리 광현(廣峴)에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광현을 일명 ‘넋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1613년(광해군 5) 이천인 이경준(李景俊)이 역신으로 몰려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623년(인조 1) 다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에도 역적사건으로 인해 세 차례에 걸쳐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도호부로 격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895년 지방관제 개편 때 이천은 부(府)에서 군이 되었으며, 음죽현과 더불어 충주부 관내에 귀속되었다. 당시의 호수는 4,967호, 인구는 2만 5338인이며, 15개 면 98개 리로 늘어났다. 현재의 이천군은 1914년에 정해진 것으로 음죽현(장호원읍·설성면·율면)이 이천군에 통합된 것도 이 때이었다.

근대 인물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 광성진(廣城鎭)에서 전사한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있으며, 독립운동가로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사형된 이수흥(李壽興)과 유택수(柳澤秀), 만주독립군의 비밀연락기관을 서울에 설치하기 위해 활약하다 옥사한 김원조(金遠祚)가 있다. 또한 김구(金九)의 정보원으로 활약하다 옥사한 여기환(余基煥), 국민교육회 및 신민회 조직에 힘쓰고 전국적으로 배일운동을 지도한 전덕기(全德基) 목사 등이 있다. 1938년 10월 이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청미면이 장호원읍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1950년 6·25전쟁 때 각급 관청과 교회·학교·주택 등이 잿더미로 변한 가운데 마을 청년들이 조직한 ‘독립청년단’이 당시 지방공산당에 대항하여 마을을 지켜나갔다. 1966년 4월 21일 대월면에 초지출장소(草芝出張所)가 설치되었으며, 1989년 4월 1일 부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3월 1일 이천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이천읍이 폐지되었고, 창전동·중리동·관고동이 설치되었으며, 5월 1일에는 대월면의 4개 동이 중리동에 편입되고 초지출장소가 폐지되었다. 2003년 2월 창전동에서 안흥동, 갈산동, 증포동, 송정동이 분리되어 증포동으로 분동되었다.

유물·유적

선사유적으로 신둔면 지석리의 남방식 고인돌을 비롯하여 장동리와 창전동 고분에서 발굴된 토기·철침 등 신석기 유물이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터로는 장호원읍 선읍리의 설성산성(경기도 기념물, 1984년 지정), 율면 산양리의 망이산성(경기도 기념물, 1993년 지정), 사음동의 설봉산성(사적, 2000년 지정), 신둔면의 원적산고성지가 있으며, 그리고 효양산토성지와 중리동의 증일리토성지, 모가면의 진가리토성지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관고동의 영월암 마애여래입상(보물, 1985년 지정)과 마장면 장암리의 마애보살반가상(보물, 1989년 지정)을 비롯하여 중리동의 이천 중리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 장호원읍의 이천 어석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 모가면의 소고리 마애여래좌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이천 자석리 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이 있다.

또한 마장면의 이평리 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관고동의 오층석탑 및 삼층석탑, 설성면의 이천 자석리 석불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호법면의 동산리마애여래상, 마옥산(磨玉山)부처바위 마애여래좌상 및 마애삼존불상, 영원사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이 밖에도 원적산 영원사, 설봉산 영월암·은성사(隱聖寺) 등의 사찰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창전동의 이천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음죽향교지(陰竹鄕校址)·설봉서원지·현암서원지(玄巖書院址)·충성공사묘(忠成公祠廟), 그리고 효산사(孝山祠)·충장사(忠壯祠) 등이 있다. 특히 관고동에 있는 설봉서원은 최근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부발읍 산촌리의 효산사는 조선왕조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충무공 조영무(趙英茂)를 모신 사당이다. 율면 산성리에는 이천 어재연 고택(국가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과 어재연 장군을 모신 충장사가 있다.

고건축으로는 기묘사화로 파직된 엄용순(嚴用順) 등 여섯 선비가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면서 여섯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고 세웠다는 육괴정(六槐亭)이 백사면 도립리에 있다. 내촌리에는 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金炳冀)의 별저(別邸)인 안동김씨고가(김좌근고택, 경기도 민속자료, 2003년 지정)가 있다.

보호수로 백사면 신대리에 이천의 백송(천연기념물, 1976년 지정)과 백사 도립리의 반룡송(천연기념물, 1996년 지정)이 있다.

교육·문화

문헌상 기록으로는 1389년(공양왕 1) 감무 이우(李愚)가 지금의 이천읍 안흥리에 세운 안흥정사(安興精舍)가 이천의 최초 교육기관이었다. 이어 1401년(태종 1)에 감무 변인달(邊仁達)이 이천향교를, 1428년(세종 10)에 현감 임목(林穆)이 음죽향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1564년(명종 19) 부사 정현(鄭礥)이 이천읍 소호에 세워 1592년(선조 25) 지금의 현충탑 자리로 옮겨진 설봉서원과 1833년(순조 33)백사면 현방리 공원 안에 세워진 현암서원(玄巖書院)은,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릴 때까지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다.

신교육기관으로는 1907년 미국인 클라크(Clark) 부인이 이천중앙감리교회 안에 설립한 양정여학교(養貞女學校)와 특신학교(特信學校)가 최초인데, 양정여학교는 1938년 일제 때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는 등 수난을 거쳐 오늘의 이천양정여자중·고등학교로, 특신학교는 이천초등학교로 이어져오고 있다. 1911년 음죽공립보통학교(陰竹公立普通學校)가 창립되었고 이어서 1면 1교의 교육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2개교와 청강문화산업대학교와 한국관광대학교가 있다.

197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가 설립, 운영하는 유네스코청년원(UNESCO Youth Center)인 ‘젊음의 집’은 국내외 청소년활동의 전문기구 구실을 하고 있으며, 군립이천도서관이 있어 교육·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그리고 1963년에 개원한 이천문화원에서는 설봉문화제(雪峰文化祭)와 각종 문화예술행사를 주관하고 자료의 연구결과를 출판하여 향토문화의 계승과 개발에 공헌하고 있다.

민속

이천의 중요한 민속놀이로 거북놀이와 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원래 경기도 일원과 충청남도·충청북도·강원도 및 전라남도 등 일부에서 전래되던 거북놀이는 30여 년 전 소멸되었으나, 이 고장의 거북놀이 기능보유자 김종린(金鍾麟)에 의해 그 원형이 재연된 이래 지금은 ‘이천거북놀이’로 유명해졌다.

팔월 한가윗날 밤, 대에 수숫잎과 각시풀·짚을 엮어 만든 거북 한 마리를 중심으로 수숫잎과 각시풀로 이엉을 엮어 만든 옷을 입은 질라아비, 농기·영기·용기 등 깃발잡이와 풍물재비 등 35∼40명으로 편성되며, 보름달이 떠오르면 거북에 대해 치성을 드림으로써 시작된다.

다드래기·길군악(길가락)·덩덕궁이·동리삼채 등 가락에 맞추어 연희되는 길놀이부터 시작하여 우물굿(샘굿)·마당판굿을 통해 마을의 복을 빈 뒤, 집집마다 문굿·뒤안굿·조왕굿·대청굿의 순서로 이어가면서 한해의 풍요한 수확에 감사하고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는 이 놀이는 집단놀이와 민속신앙으로서의 두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

줄다리기는 1920년을 전후하여 이 지역뿐만 아니라 인근지역의 주민들까지 가세하여 참가인원이 1921년 3월에는 선수 6,000명, 관객 3만 명에 이르는 대해희(大蟹戱)를 이룬 적도 있었다. 오늘날 전승되고 있는 줄다리기로는 모가면 진가리와 대월면 단월리에서 해마다 정월대보름 밤에 행해지고 있다.

이 밖에 각종 두레놀이를 비롯하여 널뛰기·연날리기·윷놀이·자치기·그네 등 세시풍속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동제로서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둔면 지석리 소당산과 마장면 장암리의 산신제는 격년제로 짝수의 해에 지내며, 보통 음력 2월 초하룻날 자정을 기해 행해진다.

산중턱의 넓은 바위를 ‘성암’이라 하여 제단으로 쓰는데,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등 제물과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되고 있다. 특히, 이 산신제를 지금까지 한 번도 중단한 일이 없다는 것을 마을사람들은 자랑으로 여기고 있으며, 산신제를 마친 날 마을은 축제분위기가 된다.

부발읍 수정리와 호법면 후안리의 우물굿은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 밤 1시경에 행해지며, 이는 기우제를 지내던 유습이 마을 공동우물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으로 바뀐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 전래되고 있는 전설로는 삼국시대 신라의 땅이었을 당시 주민의 호국정신이 얽혀 있는 「효양산금송아지전설」이 있다. 효양산에서 캐낸 황금으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기(祭器)로 사용한 뒤 매년 풍년이 들고 국력이 튼튼해지자 신라의 강성해짐을 두려워한 당나라가 금송아지를 빼앗으러 사신을 파견했다.

그러나 관민이 합심하여 당나라 사신이 지나갈 주변지역의 이름을 먼 거리를 의미하는 지명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여 사신을 그냥 돌아가게 함으로써 금송아지를 지킬 수 있었다 한다. 그래서 지금도 제일역·오천역·구만리뜰·억만리·보름다리·억억다리·이천역 따위의 지명이 전래되고 있다.

「심인연전설(沈印淵傳說)」은 세종 때 청렴한 재상으로 유명한 맹사성(孟思誠)이 온양의 어머니를 뵈러 가는 중 이천을 지날 때 진위현감과 양성현감이 장호원까지 마중 나왔다. 그런데 그 행장이 너무도 남루하여 알아보지 못하고 실수하는 바람에 당황하여 연못에 현감의 관인을 빠뜨렸다고 하는 설화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슴의 보은설화」는 서(徐)처사가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을 숨겨주어 사슴의 보은으로 80노령에 고려 충신이 된 서필(徐弼)을 낳았으며, 서필은 다시 거란의 대군을 담판으로 물리친 서희를 낳아 결국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서처사는 서씨의 시조인 서신일(徐神逸)로, 효양산에는 그의 묘와 신도비가 있다.

「두무(杜舞)고개전설」은,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가 우리나라를 유람하다 여주시와 경계를 이룬 이 고개마루에 올라 쉬던 중 맞은편 원적산 기슭에서 최고의 명당 금반형지를 발견하고 기뻐서 춤을 추었다고 하는 이야기로, 지금도 그 고개를 두무고개라 부르고 있다.

이 밖에도 신라 때 한 장수가 공주와의 사랑으로 왕의 벌을 받아 5일 만에 쌓았다는 「설성산성전설」, 인조 때 역신 김자점이 풍수설을 믿고 억지로 금반형지를 이루고자 청미천을 막아 만들었다는 「자점보전설」, 백족산 지네의 정기를 타고 나서 영특하다고 전해지는 「남이(南怡)장군과 백족산지네 퇴치전설」이 있다.

또한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이천으로 피난오자 왕을 따라 온 궁녀들이 왕조의 멸망을 두려워하여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빠져죽었다는 「원적산 여기수(女妓水)전설」, 옛날 마고할미가 금강산을 만들기 위해 흙과 바위를 나르다 흘린 흙 한줌이 산이 되었다는 「도드람산전설」 등이 있다.

이 고장에 전래되는 민요는 노동요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이 타령요·만가류(輓歌類) 등의 순인데, 노동요 중에도 논매기소리와 모내기소리가 대부분이다.

그 중에도 논매기소리의 「대허리」는 이 지방 특유의 소리로 다른 지방에서는 「단허리」라고 하는데 후렴에 특징이 있다. 가락은 대체로 단조롭고 느리나 끝날 무렵에는 빨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어-얼싸 대허리야/ 어-얼싸 대허리야/ 여보소 농군님네/ 어-얼사 대허리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어-얼싸대허리야/ 경상도 중복상은 주저리주저리열렸구나/ 어-얼싸 대허리야/ 났다네 났다네 전라어사가 합당하니/ 어-얼싸 대허리야/ 서울이라 유다르게 달도돋는곳이 보기도 좋다/ 어-얼싸 대허리야/ 천하지대본은 농사밖에 또있는가/ 어-얼싸 대허리야.”

대체로 이 노래의 내용은 달이 돋도록 일을 열심히 하는 상황을 읊고 있는데, 주제는 농사예찬이다.

태평요는 「바우타령」과 「방아타령」이 전해오고 있는데, 그 중 「바우타령」은 이 지방 특유의 우수한 작품이다.

“첫발로 문안 거지바우/ 문턱바우 문바우/ 동구재 배꼽바우/ 우박골로 내려가서/ 필운대 삿갓바우/……(중략)……/ 농바우같은 돌맹이같은 밥에/ 청대둘듯/ 듬성듬성 박혔으니/ 그밥을 한그릇 먹고나서/ 누릉밥을 훑으려/ 솥뚜껑을 열고보니/ 화태(火太) 한쌍이 나오누나.”이 노래는 가난한 서민의 식생활의 일면을 전국 명승지의 해학적인 바위들의 이름으로 풍자한 소박하고도 낙천적인 생활관을 잘 반영한 걸작이다.

이 밖에도 만가류인 「회심곡」이 여럿 전한다. 이는 인생무상·충효·내세관 등이 주제를 이루고 있는데, 유·불·선·무(巫)의 복합된 사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38.4%가 경지이고 38.7%가 임야이다. 이 밖에 하천 3.2% 도로 4.1%, 대지가 3.2%이다. 경지 중 논이 1만 133ha이고 밭은 7,558ha이다. 이들 지역에는 소호(沼湖)·설봉호수·용풍저수지·성호저수지·용면저수지 등이 있어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무·배추, 과실류로 사과·포도 그리고 가축류로 젖소·닭·오리 등의 축산물이 사육되며 이 밖에 원예농업으로 화훼가 생산된다. 영동고속도로와 산업도로의 개통으로 제2차 산업 시설이 집중되면서 농업인구와 경지 면적이 계속 줄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14.3%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14.7%이다.

주요 광산물은 고령토가 생산되고 있다. 주요 제조업은 식료품공업·조립금속공업·비금속공업·화학공업·섬유공업·도자기 공업 등이 있다.

이 지역은 고령토가 많이 생산되어 옛날부터 도자기 공업이 발달했는데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이래 신둔면 일대에는 도예촌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는 우리나라 도자기 생산의 3분의 1정도를 생산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청자·분청백자·철채(鐵彩)·철유(鐵柚)·잡유(雜釉) 등 전통자기의 원형을 재현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일본·미국 등 외국에도 수출하고 있다.

상업 활동은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1830년대에 이천읍에는 매월 2·7일에 열리는 이천읍의 부내장(府內場) 또는 읍내장이 있었고, 3·8일에 열리는 대월면의 군량장(郡梁場)이 있었다. 그러나 5일장이 점차 사라지고 상설시장·연쇄점이 들어서고 있는데, 장호원읍에는 대형마트가 있다. 정기 시장은 이천장이 2·7일, 장호원읍의 장호원장이 4·9일에 열리고 있는데 주요 거래품목은 쌀을 비롯하여 복숭아·배·사과 등이다.

교통은 고속도로와 국도가 동서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하나인데 고속도로는 중부고속도로가 이천 서쪽을 남북으로 지나고, 영동고속도로가 이천 남부를 동서로 지나며, 국도 37호선이 이천 동남단에 북진하고 있다. 국도 42호선이 영동고속도로 북쪽에 동서로 나란히 지나고 있다. 철도로는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경강선이 2016년부터 부분적으로 개통하여, 이천시를 지나고 있다.

관광

북서쪽은 잔구성 산지를 이루고 동쪽은 나지막한 저지대를 이루며 중앙에는 분지가 발달되어 이곳에 온천도시가 발달되어 있다. 이천시 부근에는 광주산맥이 차별침식을 받아 천덕봉·정개산·건지산 등의 구릉성 산지와 저평한 분지가 발달되었고 이곳 분지와 하천 유역에 농경지와 도시가 관광온천지로 발전하고 있다.

이천의 관광 토산물로써 명물을 든다면 쌀·땅콩·도자기를 손꼽는다. 특히 도자기 원료인 점토의 50%가 이천에서 생산되고 140여 개의 도자기 가마가 곳곳에 밀집되어 도예촌을 이루고 있어, 이곳은 자기문화의 명소로 알려진 관광지이다. 이 고장의 도예촌은 학생들의 실습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도자기 전문상품점에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또한, 백제땅으로 시작된 이천은 영토확장의 주무대였던 고장이라서 산성터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알려진 설봉산성터와 원적산고성터·효양사토성터·중일리토성터·마이산마이산성터 등이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불교유적 중심의 관광지로는 설봉산 영월암과 법당 뒷편의 마애불, 관고리의 오층석탑, 장암리의 마애보살좌상, 어석리 석불입상, 소고리의 마애불, 영원사의 석조약사여래좌상, 마옥산의 부처바위와 마애여래좌상 및 마애삼존불상 등 수많은 옥외 마애불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다.

설봉산성은 삼국시대 말 고구려군이 축성한 산성터인데 산줄기 남단에는 외성으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토성 흔적이 남아 있는데, 신라 김유신장군이 삼국통일의 작전을 논하면서 활약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또한 도예촌이 신둔면 일대에 집중되어 도예전시관도 많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고장에 도예가들이 터를 잡은 이유는 끈기있고 불에 잘 견디는 도석질의 점토가 많고 산에는 적송이 많아 장작 구하기가 쉽고 물이 좋아 흙반죽이 잘 될 뿐만 아니라 서울과 교통이 편리한 입지조건 때문이다.

한편, 관광객이 가장 많은 이천온천은 이천시내 안흥리에 자리잡고 있어 지리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온천이다. 수질은 단순천으로 무색, 무취, 무미천으로 30% 정도의 알카리성 온천이다. 최근에는 영동고속도로의 확장으로 진입로 정비가 잘 되어 많은 온천관광객이 찾고 있는 경기도 유일의 온천관광지이다.

읍·면
  1. 부발읍(夫鉢邑)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41.87㎢, 인구 3만 829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무촌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부모곡면 또는 부면이라 하여 죽동·소수·무촌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발면과 여주군(지금의 여주시) 수계면(首界面) 상거리(上巨里)와 가서면(加西面) 상응동(上應洞) 각 일부가 병합되어 부모곡과 발산의 이름을 따서 부발면이 되었다가, 1989년 읍으로 승격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면의 남서쪽에 효양산(孝養山, 178m)을 제외하면 지역의 대부분이 1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에 가깝다. 특히, 북서 면계를 흐르는 복하천과 면의 중앙을 종단하는 죽당천(竹堂川)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있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 비율이 1/2이 훨씬 넘고, 논과 밭의 면적이 거의 비슷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이외에도 과일류 재배와 원예산업도 활발하다. 축산업으로 돼지·닭·사슴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돼지 사육량이 많다.

무엇보다도 제조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으로, 제조업 종사인구가 시 전체 제조업 종사인구의 과반수 이상을 점한다. 섬유·식품·전자·양조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업체들이 많이 있다. 농업과 제조업이 동시에 발달한 전형적인 도농복합형의 성격을 띤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의 이천인터체인지가 면 남단을 통과하며, 장호원읍에서 이어지는 3번 국도가 남서부 지역을, 42번 국도가 3번 국도와 만나 북동쪽으로 종단한다. 이 밖에 면의 주요 도로망으로 연결되는 3·9번 국도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문화유적은 산촌리에 효산사가 있다.

무촌(茂村)·죽당(竹堂)·신원(新元)·고백(高白)·대관(大冠)·마암(馬巖)·응암(鷹巖)·산촌(山村)·신하(新河)·가좌(加佐)·아미(牙美)·수정(水井)·송온(松溫)·가산(柯山) 등 14개 리가 있다.

  1. 장호원읍(長湖院邑)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60.41㎢, 인구 1만 5820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장호원리이다.

본래 음죽군(陰竹郡) 지역으로 음죽읍내의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평촌·석교·오창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면의 이목·황정 등 12개 리와 오창 등 14개 리를 관할하다가 군내면(郡內面) 5개 리가 병합되면서 청미산의 이름을 따서 청미면이 되어 이천군에 편입되었다. 1941년 청미면이 읍으로 승격되면서 장호원읍으로 개칭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북동쪽에 용채산(183m), 서쪽 경계에 설성산, 남쪽 중앙에 백족산이 자리잡았다. 동남쪽의 면계를 흐르는 청미천과 그 지류인 설성천·자족천·진암천(珍巖川) 유역에 넓은 평야가 조성되었다. 시에서 전체면적이 제일 넓은 만큼 농경지 면적 또한 가장 방대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과수 등인데, 특히 사과·배와 미백·황도(앨버터) 복숭아는 이 지역의 특산물로 당도가 매우 높아 전국의 소비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한우·젖소·돼지를 중심으로 한 축산업 또한 활발한 편이다.

교통은 장호원리에서 3·37·38번 등 3개의 국도가 동서남북을 교차하는 등 중부내륙의 교통 요충지역에 해당한다. 이 외에 3번 국도와 연결되는 6번 국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어석리에 석불입상, 선읍리에 설성지·신흥사(新興寺)가 있다.

장호원(長湖院)·노탑(老塔)·진암(珍巖)·오남(梧南)·대서(大西)·방추(方楸)·선읍(善邑)·이황(梨黃)·나래(羅來)·풍계(豊界)·어석(於石)·송산(松山)·와현(瓦峴) 등 13개 리가 있다.

  1. 대월면(大月面)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31.44㎢, 인구 1만 350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지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월량촌 또는 월면이라 하여 구시·장평·송라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양면·초지면과 발산면 가좌동(加佐洞) 일부가 병합되어 대면과 월면의 이름을 따서 대월면이 되어 단월·대포·도리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66년 초지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1996년 초지출장소가 폐지되었고, 단월(丹月)·장록(長錄)·대포(大浦)·고담(高潭) 등 4개 리가 중리동(中里洞)으로 편입되었다.

북서부에 해룡산(海龍山, 201m), 남서부에 정명산(鼎鳴山, 167m) 등을 제외하면 전체면적 중 약 90%가 높이 100m 이하의 평지지대에 해당한다. 북부 지역을 관류하는 장록천·해룡천·대흥천과 고담저수지, 중앙의 도리천 등 넓은 충적평야가 입지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면의 북부지역은 기업체가 몰려 있는 주민 밀집지역이고 남부지역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구분되며, 최근에는 아파트단지의 조성으로 전입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농업의 경우, 전체면적 중 농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1/2 정도이고,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두류 등이 있는데, 특히 보리의 산출량이 두드러진다. 가축은 한우·젖소·돼지·닭 등의 사육이 활발한데, 특히 한우·닭의 사육수가 많다. 조선시대 당시 진상품으로 유명했던 이천의 자채쌀과 군량리의 일부 농가에서 재배되는 게걸무는 지역특산물로서 유명하다. 제조업은 금속·도자기·섬유·화학 등의 업종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가 면 북단을 통과하며 3번 국도가 동부지역을 살짝 거쳐간다. 이밖에 서부지역 전체를 종단하는 383번 지방도와 3·10번 시·도 등이 면 전체를 연결하여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군량리에 무우정(舞雩亭)·석불좌상 등이 있다.

초지(草芝)·도리(道理)·구시(九時)·군량(郡梁)·송라(松蘿)·장평(長坪)·부필(夫必)·사동(巳洞)·대대(大垈)·대흥(大興) 등 10개 리가 있다.

  1. 마장면(麻長面)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1.38㎢, 인구 7,870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오천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마전동면(麻田洞面) 또는 마면이라 하여 관동·회교·억만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수왕면 전체와 호면 매작리(梅勺里) 일부가 병합되어 마전동과 장수왕의 이름을 따서 마장면이 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북쪽 경계에 양각산·설봉산, 북동부에 도드람산(일명 저명산), 남서쪽에 와룡산(臥龍山, 208m), 남쪽에 건지산·소학산 등이 위치한다. 남부의 복하천·해월천(蟹越川) 유역과 북부의 오천 주변에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전체면적 중 경지율이 그다지 높지 않으나 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그 밖에 두류의 경작과 구릉지를 이용한 양잠·과수업이 발달하였다. 가축은 닭·사슴·산양 등의 사육도 행해진다. 제조업으로는 축산가공 및 제분업 관련 업체가 많으며, 최근에는 준도시지역과 지산리조트 등 위락시설 개발이 진행 중이다.

교통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덕평인터체인지를 지나 중앙을 횡단하며, 중부고속도로가 면 북동부를 종단한다. 42번 국도가 면 중앙을 가로지르며, 호법면에서 이어지는 329번 지방도가 면 남동쪽과 북서부를 연결한다. 그 밖에 남쪽에 5번 시·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장암리에 태평흥국명마애보살좌상, 이평리에 석불입상, 관리에 내원사석탑, 작촌리에 광주이씨효열비(廣州李氏孝烈碑) 등이 있다.

오천(午川)·양촌(陽村)·관(冠)·회억(灰億)·장암(長巖)·목(木)·표교(標橋)·이치(梨峙)·각평(各坪)·덕평(德坪)·이평(泥坪)·해월(蟹越)·작촌(芍村) 등 13개 리가 있다.

  1. 모가면(暮加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40.98㎢, 인구 4,67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진가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가마골의 이름을 따서 가마곡면 또는 가마면이라 하여 가동·진내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모산면의 소고지·원두 등 6개 리와 대양면의 신갈산과 음죽군 북면의 앵산동 일부가 병합되어 모면과 가면의 이름을 따서 모가면이 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서쪽 경계에 대덕산, 남쪽에 마옥산·큰박골산(190m), 중앙에 마오산(摩五山, 275m) 등이 솟아 있으나, 대부분은 낮은 구릉지이다. 면의 동단을 흐르는 원두천(院頭川)과 양화천(楊花川), 서쪽의 두미천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농경지가 전체면적의 2/5을 차지하는 농촌지역으로,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을 비롯하여 보리와 배추·고추의 산출량이 많으며, 포도·복숭아·사과 등의 과수업도 발달하였다. 이와 함께 연초와 인삼 등 경제성 높은 특용작물의 재배도 이루어진다. 축산업도 활발한 편인데 한우·젖소·돼지·닭·사슴 등이 주로 사육된다.

교통은 면의 중앙을 종단하는 중부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341번 지방도가 면의 서쪽을, 383번 지방도가 면 동쪽을 종단한다. 그리고 면 동쪽에 10번 시·도가 지난다. 문화유적은 진가리에 토성지, 산내리의 사지에 부도(浮屠)와 백자도요지, 소고리에는 마옥산부처바위의 마애여래좌상 및 마애여래불상이 있다.

진가(陳加)·서경(西坰)·산내(山內)·송곡(松谷)·양평(梁坪)·소사(素沙)·원두(院頭)·소고(所古)·신갈(薪葛)·어농(於農)·두미(豆美) 등 11개 리가 있다.

  1. 백사면(栢沙面)

시의 북쪽에 위치한 면. 면적 32.55㎢, 인구 1만 233명(2015년 현재). 면소재지는 현방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백토리면(柏土里面) 또는 백면이라 하여 우곡·내촌·조읍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면 전체, 사면 중 2개 리를 제외한 전체, 여주군(지금의 여주시) 흥곡면(興谷面) 상대동(上大洞)·하대동(下大洞)·외사동(外絲洞) 각 일부가 병합되면서 백토리와 사북의 이름을 따서 백사면이 되어 12개 리로 개편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북서쪽에 원적산(圓寂山, 563m)이 신둔면과 경계를 이루고, 남부 중앙에 보인산(寶仁山)이 있다. 면 남쪽 끝을 흐르는 복하천 유역에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산수유·화훼·황기 등의 특용작물 재배가 활발하며, 축산업으로 돼지·닭·산양 등의 가축사육이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다.

교통은 383번 지방도가 면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면을 종단하며, 그 밖의 도로망으로 1·3번 시·도가 각각 남북을 횡단한다.

문화유적은 신대리에 백송, 내촌리에 안동김씨고가가 있으며, 그밖에 송말리의 영원사 경내에는 영원사석조약사여래좌상·영원사수목군락지, 도립리에 육괴정·반룡송 등이 있다. 송말리와 도립리의 원적산 기슭은 전국 제일의 산수유 산지인데, 봄이면 노란꽃이 지천으로 피며 가을엔 빨간 열매가 인상적이다.

모전(牟田)·도지(道知)·조읍(助邑)·우곡(牛谷)·내촌(內村)·상룡(上龍)·백우(白隅)·현방(玄方)·송말(松末)·도립(道立)·경사(京沙)·신대(新垈) 등 12개 리가 있다.

  1. 설성면(雪星面)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51.65㎢, 인구 5,214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금당리이다.

본래 음죽군(陰竹郡) 지역으로 음죽읍내의 서쪽이 되므로 서면이라 하여 금성·당전·제갈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북면(遠北面)·근북면(近北面)의 대부분, 이천군 월면(月面)·가면(加面)의 일부, 그리고 여주군(지금의 여주시) 소개면(召開面)·가서면(加西面)의 일부가 통합되어 12개 리로 개편되면서 설성산의 이름을 따서 설성면이 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서쪽 경계에 마옥산·큰박골산, 남서부에 노성산(269m), 동쪽의 설성산(291m)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낮은 구릉지이다. 장릉천·제요천·송곡천(松谷川)·대신천(大新川) 유역에 넓은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경작지로 이용된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의 비율이 1/2 정도이며, 주민 대부분이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이며, 특산물로 담배·고추 등과 과수로는 포도·복숭아 등의 생산량이 많다. 농가경쟁력 향상의 일환으로 토마토·딸기를 중심으로 작목반이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한우·젖소·돼지 등의 가축사육도 활발한데, 특히 젖소의 사육두수가 시내 제1위이다.

교통은 38번 국도가 지역 남단을 횡단하고, 이 국도에서 연결되는 383번 지방도가 면 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향하고 331번 지방도가 면의 남서부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면서 서로 교차한다. 이 밖에 장호원읍에서 시작된 6번 시·도가 면 남쪽에서 중앙을 지나 다시 북부쪽으로 연결되는 등 원활한 도로망을 구비하였다. 문화유적은 자석리에 석불입상이 있다.

금당(金堂)·장릉(長陵)·행죽(行竹)·제요(諸蓼)·신필(新筆)·장천(長泉)·자석(自石)·암산(巖山)·송계(松界)·상봉(上峰)·수산(樹山)·대죽(大竹) 등 12개 리가 있다.

  1. 신둔면(新屯面)

시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36.46㎢, 인구 1만 1017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수광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둔지산면 또는 둔면이라 하여 수남·고척·마교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면·둔면 전체, 사면의 2개 리가 병합되어 13개 리로 개편, 신동과 둔지산의 이름을 따서 신둔면이 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면 북동쪽 경계에 천덕봉(天德峰, 635m)·원적산 양 봉우리가 면 전체를 굽어보며, 북쪽 중앙에 정개산(鼎蓋山, 407m), 남서쪽에 양각산(羊角山, 384m) 등의 산자락이 면내로 향한다. 신둔천과 신대천(新垈川) 유역에 곡저평야가 발달하여, 전체 면적 중 농경지의 비율이 2/5 정도로 높은 편이고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콩·보리 등이며, 인삼·화훼 등의 특산물 재배도 이루어진다. 축산업으로 젖소·돼지·토끼·오리 등이 사육되며, 특히 토끼·오리 등의 사육수는 시 전체에서도 많다.

제조업은 도자기·전자·의약품 관련 분야가 두드러지고, 특히 도자기 업체수가 수백 개에 이른다. 최근 들어 수광리·소정리 일대에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는 등 도시화율이 가속되는 추세다.

교통은 중부고속도로가 면의 남서쪽을 관통하고 있으며 3번 국도가 중앙을 종단하고, 그 밖에 2번 시·도가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도로망이 계속 확대되는 중이다.

문화유적은 지석리 지석묘와 생활자기의 맥을 이어가는 200여 개의 도요지가 있다. 그리고 장동리에 고분이 있고, 수광리의 이천도예촌 주변에는 국내 유일의 해강도요전시관을 비롯한 도요연구소 등이 옛 명성을 계승하고 있다.

수광(水廣)·남정(南井)·지석(支石)·장동(長洞)·도봉(道峰)·도암(道巖)·수하(水下)·수남(水南)·고척(高尺)·용면(龍眠)·인후(印後)·마교(馬橋)·소정(小亭) 등 13개 리가 있다.

  1. 율면(栗面)

시의 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6.76㎢, 인구 2,939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당리이다.

본래 음죽군 지역으로 둔지산면 또는 둔면이라 하여 수남·고척·마교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상율면(上栗面)·하율면(下栗面) 전체, 충청북도 음성군 법왕면(法旺面)의 석원리(石院里)와 두의면(豆衣面) 용산리(龍山里) 각 일부가 병합되어, 10개 리로 개편되면서 율면이라 하여 이천군에 편입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동쪽으로는 임오산·도투미산(164m), 북서쪽에 묘룡산(妙龍山, 174m), 남서쪽에 마이산, 남동쪽에 팔성산 등 많은 산지가 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북쪽 면계를 흐르는 청미천과 그 지류로 면내 중앙을 남북으로 흐르는 석원천(石院川)·금산천(金山川), 동쪽의 응천 유역에 넓은 평야가 분포한다. 전체면적 중 경작지가 1/2에 해당할 정도로 대표적인 농촌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고추·잎담배의 경작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또한 한우·젖소·닭 등의 가축사육과 사과·포도 등의 과수업도 활발하다.

교통은 383번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종단하고, 기타 7·8번 시·도 등이 있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산성리에 어재연장군생가(魚在淵將軍生家)·충장사·칠성암석불좌상, 산양리의 망이산성 등이 있다. 본죽리에 우암사·일실사효정문(一室四孝旌門), 석산리에 석산리석교, 월포리에 유효자정문, 오성리에는 조효자정문 등이 있다.

고당(高塘)·신추(新楸)·본죽(本竹)·북두(北斗)·산양(山陽)·석산(石山)·산성(山星)·오성(五城)·월포(月浦)·총곡(叢谷) 등 10개 리가 있다.

  1. 호법면(戶法面)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37.94㎢, 인구 5,833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후안리이다.

본래 이천군 지역으로 호법면이 되어 유랑·오산·상평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면의 상송갈·단월천, 장면의 토곡, 모면 석당리(石塘里) 일부가 병합되어 9개 리로 개편되고 다시 호법면이 되었다.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통합되었다.

산지는 서쪽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계속 연결되는 전형적인 서고동저(西高東低)를 나타내는데, 와룡산·소학산·뒤동골산(223m)·봉의산(鳳儀山, 331m)·대덕산 등이 그것이다.

복하천의 지류인 장암천·매곡천·동산천 등이 흐르고, 산지를 찾을 수 없는 동부는 커다란 평야지대를 이룬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 비율이 높지 않으나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상대적으로 많은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맥류와 채소의 재배가 활발하며, 한우·젖소·사슴·오리 등의 가축사육도 활발하다.

교통은 영동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교차되는 호법인터체인지가 있으며, 42번 국도가 면의 북부를 통과한다. 이 밖에 4번 시·도가 면의 중앙을 지나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동산리에 마애여래상이 있다.

후안(厚安)·유산(酉山)·안평(安坪)·주미(珠美)·주박(珠珀)·단천(丹川)·동산(東山)·매곡(梅谷)·송갈(松葛) 등 9개 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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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시(www.i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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