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석을 채취하다가 석회암동굴 유적이 발견되어 1959년 3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그다지 크지 않은 천연동굴이다. 지표 밑 105∼130㎝ 깊이에 두께 약 50㎝의 문화층이 있고, 그 밑에는 20∼40㎝ 두께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진흙층이 있으며, 그 아래로 다시 15∼20㎝의 또 하나의 문화층이 있었다. 아래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문화층〔櫛文土器文化層〕이고, 위는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문화층(無文土器文化層)이었다.
아래의 문화층에서는 빗살무늬토기파편과 그물추 2점, 석촉반제품, 곡옥파편처럼 생긴 장신구 등이 출토되었다. 그 밖에 골제첨두기들도 몇 점 출토되었다.
빗살무늬토기편의 문양은 생선뼈무늬〔魚骨文〕도 있고 평행사선을 무질서하게 엇그은 것도 있으며 지그재그문양도 있다. 바탕흙은 진흙에 모래를 섞은 것이 대부분이고 운모·장석·석면·활석 등을 섞은 것도 있으며 모두 갈색이었다.
완전히 복원될 수 있는 것은 없으나 문양의 형태가 청진 농포리·서포항(西浦項) 등의 빗살무늬토기와 유사하므로 기형은 납작바닥〔平底〕일 것으로 추정되며 시대도 신석기시대 후기로 생각되고 있다. 위의 무문토기문화층에서는 토기·석촉·석착(끌)·관옥·방추차·청동도끼〔靑銅斧〕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복원이 가능한 12개분, 형태를 알 수 있는 5개분이 출토되었다. 기형은 항아리, 단지, 발이 달린 것 등 다양한데 목이 긴 항아리 종류가 많다. 대개 고운 흙으로 기면을 마연한 흑색토기들이다.
항아리 종류는 납작바닥에 타원형의 배가 불룩한 몸체에 밖으로 긴 목을 가졌고, 기면 전체에 여러 줄의 가는 선을 악보의 오선을 긋듯이 돌렸다.
그리고 흙판을 활처럼 구부려서 상하로 구멍이 나게 붙인 손잡이가 달렸다. 이 손잡이는 단지나 항아리 모두에 붙어 있는데, 큰 것은 높이가 26㎝나 되는 것도 있다.
또 단지 종류는 입술을 약간 밖으로 벌리면서 짧게 붙인 것과 조금 길게 붙인 것이 있다. 그 중에는 입술이 벌어짐으로써 휘어진 부분에 손톱같은 것으로 찍어서 문양을 낸 것도 있다.
이들은 그 특징으로 인해 ‘미송리형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개천 묵방리 지석묘에서도 출토되었다. 기형의 발달이나 토기의 질로 보아 무문토기의 후기형태에 속하는 것이다.
마제석촉은 16개가 출토되었는데, 단면능형의 유경양익촉(有莖兩翼鏃)이 3점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운데가 옴폭 팬 만입식무경촉(彎入式無莖鏃)이다.
청동도끼는 날이 휘고 버선코처럼 넓어진 공부(銎斧)로 등에서 날까지의 길이가 4.5㎝이다. 이러한 형태의 청동도끼는 요동지방의 석관묘에서 출토되는 용범(鎔笵)과 비슷하나, 형태상으로 보면 조금 선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상층유적의 연대는 출토유물로 미뤄보면 토기는 후기형태이지만 청동도끼는 세형동검의 초기형식인 이른바 만주식 동검과 함께 나오는 형식보다 오래된 것으로 보여 서기전 1000년대의 전반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문토기는 서북지방에서 형식상 빠른 변화를 보이면서 서기전 1000년대 전반기에 후기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해 점차 중부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흑색마연의 장경호(長頸壺)로 발전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