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때 좌평(佐平)으로 있다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으로 귀양갔다.
660년(의자왕 20)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므로, 왕이 좌평의직(義直), 달솔(達率)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려고 회의를 열었으나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백강(白江 또는 伎伐浦)과 탄현(炭峴 또는 沈峴)은 우리 나라의 요새지이므로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병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 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지금도 충청남도 부여에서는 백제 말기의 충신인 성충(成忠)·흥수·계백을 삼충사(三忠祠)에 제향하여 매년 가을철에 부여군민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