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오도독부 (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백제의 영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하려고 한 지방 통치 기구.
제도/법령·제도
시행 시기
660년
폐지 시기
677년
시행처
당나라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백제오도독부(百濟五都督府)는 삼국시대에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백제의 영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하려고 한 지방 통치 기구이다.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장악하고, 이후에 있을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하려고 한 지방 통치 기구이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이 흥기하여 백제 영토에 대한 통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고, 곧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중심의 새로운 체제로 바꾸게 되면서 소멸하였다.

정의
삼국시대,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백제의 영역을 지배하기 위하여 설치하려고 한 지방 통치 기구.
구성과 위치

660년(의자왕 20) 7월 18일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자, 당나라는 백제 지역을 장악하고 고구려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지방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와 『구당서(舊唐書)』 고종본기 및 「대당평백제비(大唐平百濟碑)」 비문 등에 의하면, 당나라는 백제 고지에 5 도독부(都督府) 37주(州) 250현(縣)의 지방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고 하였다.

백제 영토를 5구역으로 나누어 상위 통치기구인 도독부를 두고 하위의 주와 현을 관할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백제 고지에 설치하려고 했던 5도독부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마한도독부(馬韓都督府), 동명도독부(東明都督府), 금련도독부(金漣都督府), 덕안도독부(德安都督府)이다. 이 가운데 웅진도독부는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농성하였던 웅진성(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나머지 4도독부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당나라가 설치하였다는 5도독부 37주 250현이라는 지방 행정 단위가 원래 백제의 지방 행정 단위였던 5방(方) 37군(郡) 200성(城)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백제의 행정 단위를 그대로 당나라의 지방 통치 기구로 전환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5도독부는 백제의 5방을 계승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5방 가운데 동방의 치소가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 일대인 득안성(得安城)인데, 5도독부 중 덕안도독부와 음이 유사하여 같은 위치라고 추정된다. 나머지 3도독부 역시 3방의 치소성에 설치하려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3방의 위치를 정확히 비정할 수 없기에, 3도독부의 위치 역시 확인하기 어렵다.

성격과 기능

당나라에서 도독부는 군사적으로 여러 주(州)를 관할할 수 있으며, 주와 마찬가지로 그 관할 하에 속현이 있어 그들에 대한 민정업무도 담당하였다. 당나라는 5도독부를 최고 지방 통치 기구로 삼아 그 아래에 있는 주와 현의 업무를 지휘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5도독부 체제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의 이민족 지배 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당나라는 정복한 이민족 집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기미정책(羈縻政策)을 채택하였다. 중국 왕조는 주변 이민족의 지역을 정복한 후 군현제를 적용시키는 직접 지배를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경제력과 군사력이 요구되었다. 이에 타협책으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기미정책이다. 기미란 ‘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관계를 끊지 않을 뿐이다.’라는 뜻으로 중국 왕조에 반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강제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나라는 복속한 이민족의 땅에 기미도독부, 기미주현을 설정하고, 그 지역의 이민족 수장이나 유력자를 도독, 자사(刺史) 등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이들 이민족 도독, 자사는 당나라의 지방관제에 포섭되었지만, 당 내지의 정식 주현과는 달리 이민족 사회의 기존 질서가 그대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이 경우 이민족 집단이 당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기가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기미도독부와 주현을 관할하는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백제 고지에 설정된 5도독부 체제도 이와 유사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백제조에는 5도독부가 보이지 않고 대신 1도독부 · 7주(州)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의거하여 최고 통치 기구인 도호부가 사비성에 설치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백제 지역에 남아있던 유인원(劉仁願)이 도호로서 5도독부를 지휘하였다는 것이다. 혹은 도호부가 아니라 절충부(折衝府)가 두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5도독부 상위에 도호부나 절충부가 있었다는 명확한 근거는 없다.

변천

5도독부는 백제 고지를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하고자 하였던 당나라의 지방 통치 기구였으나, 계획대로 설치되고 운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북방의 방령(方領)이었던 예식진(禰寔進)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백제가 멸망하기는 하였지만, 바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 나당연합군이 백제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 없었다.

660년 9월 23일, 당나라는 좌위중랑장(左衛中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으로 삼아 파견하였다. 왕문도는 돌궐(突厥)과의 전선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여 백제 지역을 안정화시킬 임무를 가지고 파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도독들의 임명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5도독부 중 웅진도독부 지역과 유인원이 주둔하고 있었던 사비성 정도만 당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661년 3월 12일, 백제부흥군이 중방의 치소성이었던 고사성(古沙城)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나, 663년 2월 신라군이 백제부흥군을 공격하였던 곳이 남방의 치소성 구지하성(久知下城) 인근의 거물성(居勿城)사평성(沙平城) 및 동방의 치소성으로 추정되는 덕안성(德安城)이었던 사실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특히 덕안도독부 지역으로 추정되는 덕안성을 백제부흥군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5도독부가 실제로 설치되어 운영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663년 2월, 신라가 공격한 덕안성을 동방 치소성인 득안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7 덴지[天智]천황 2년 2일조 기사에 신라가 백제의 남쪽 경계에 있는 4주(州)를 불태우고 안덕(安德) 등의 중요 지역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안덕으로 잘못 기록된 곳이 덕안성인데, 백제의 남쪽 경계 지역이라고 하였으므로 남해안에 가까운 지역이지, 이를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으로 추정되는 득안성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맞다면 이 기사를 근거로 덕안도독부 지역을 백제부흥군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신라군이 663년 10월 21일부터 11월 4일까지 임존성(任存城)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다가 후퇴한 기록이 보인다. 임존성은 서방의 치소성이었던 도선성(刀先城) 부근이므로, 덕안성을 덕안도독부라 하지 않더라도, 4방에 설정된 4도독부 지역을 당나라가 장악하지 못하였고, 5도독 체제가 기능하지 못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당나라는 백제 지역에 대한 지배 방식을 불가피하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유인원은 662년 7월 이전에 당군의 근거지를 사비에서 웅진으로 옮기게 되고, 유인원이 웅진도독으로서 백제 지역 통치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 사실상 웅진도독부를 정점으로 하는 1도독부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후 이 체제는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군이 다시 백제 지역으로 진출하고 당군도 태세를 가다듬으면서, 백제부흥운동은 약화되고 소멸되어 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신라군이 백제 영역을 상당 부분 차지하게 되었고, 여전히 백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5도독부 체제는 기능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백제부흥운동이 소멸한 뒤, 그리고 신라가 백제 고지를 공격하여 671년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기 이전까지 『삼국사기』 지리지에 보이는 웅진도독부 · 7주 체제가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구당서(舊唐書)』

단행본

김영관, 『백제 부흥운동 연구』(서경문화사, 2005)
노중국, 『백제부흥운동사』(일조각, 2003)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Ⅰ, 고구려 · 백제 · 낙랑 편(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논문

문다성, 「당의 웅진도독부 지배 체제의 실상」(『신라사학보』 49, 신라사학회, 2020)
박지현, 「웅진도독부의 성립과 운영」(『한국사론』 5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13)
김수미, 「웅진도독부 연구」(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방향숙, 「백제고토에 대한 당의 지배체제」(『이기백선생고희기념한국사학논총(상)-고대편‧고려시대편』, 일조각,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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