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평백제국비는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제1층 탑신과 옥개받침에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蘇定方)의 공적을 새겨둔 기공비이다. 당평제비, 평제비, 소정방비, 당평제탑비, 평제탑비, 정림사지오층석탑각자, 정림사지오층석탑미석각자 등으로도 불린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당의 백제정벌을 합리화하고 종군 장수를 미화하기 위해 백제를 상징하는 정림사 석탑에 비문을 새겨 넣었다. 당군의 공적만 기록하였다는 한계가 있지만 백제 멸망 당시 정치상황과 지방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알려주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660년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킨 당의 대장군 소정방이 정림사지 5층 석탑의 탑신과 옥개받침에 자신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백제 멸망 직후인 660년 8월 15일에 당의 소정방이 하수량(賀遂亮)으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고, 권회소(權懷素)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한 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고 제목을 붙여 정림사지 석탑에 새긴 것이다. 비명은 탑신에 가로와 세로로 방격을 그어 구획한 후 글자를 새겨 넣었다. 글씨체는 제목은 전서체, 본문은 해서체이다.
대체적으로 단정하고 고른 편이지만, 중반부 이후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글씨 크기도 고르지 않고 옹졸해진다. 석탑 1층 탑신의 남쪽면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쪽면, 북쪽면, 동쪽면 순서로 총 117행에 걸쳐 1,934자를 새겼다. 또한 1층 탑신의 서쪽과 북쪽 옥개받침의 아래 면에 행당 3자씩 64행에 걸쳐 192자를 새겼다. 문장의 형식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이다. 옥개받침에는 종군 장수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이라는 명칭 이외에 당평백제국비, 당평제비, 평제비, 소정방비, 당평제탑비, 평제탑비, 정림사지오층석탑각자, 정림사지오층석탑미석각자 등으로도 불린다. 또한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대당평백제국비명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평제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거의 같은 내용을 궁궐 안에 있던 석조(石槽) 표면에도 새겼는데,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에는 전체 글자 수가 2,126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비명에는 당이 백제를 정벌한 까닭과 출정한 당군의 편성 및 장수들에 대한 칭송,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인 포로와 백제 영토에 대한 처리 내용 등이 담겨져 있다. 모두 당의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고 종군 장수들을 미화하는 내용이다. 비명 후반부에는 하수량이 문장을 지은 까닭과 당의 백제 정벌을 찬양하는 글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종군 장수들의 명단이 별도로 기록되어있다. 하수량은 스스로 문장에 재주가 있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고,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며 백제 정벌에 대한 찬양문을 지어 정벌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도성 한복판에 있어 여러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고, 불교 국가였던 백제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사찰이라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여기에 서 있는 석탑에 백제를 멸망시킨 전공을 새긴 것은 백제인의 종교와 신앙을 짓밟는 야만적인 행위였다. 또한 궁궐의 석조에도 같은 내용을 새긴 것은 더 이상 백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멸망하였다는 것을 백제의 유민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비명의 기록은 당과 적대적이었던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한 것과 의자왕의 실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당의 정벌이 천륜을 어긴 국가에 대한 정당한 것라고 합리화시켰고, 소정방이 직접 거느렸던 당군의 공적만을 기록한 기공비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비명은 백제 멸망기의 정치상황과 지방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비명은 멸망 당시 백제 태자가 부여융(扶餘隆)이었고, 호구는 74만호 620만에 달할 정도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지방을 5방과 37군 250성으로 편제하였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대개의 비명은 비문을 새길 돌을 따로 마련한 후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당평백제국비명은 비석이 아닌 석탑의 탑신을 활용해 비문을 새겨 넣은 것으로 유례가 거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은 당으로 귀국하기 전에 자신의 공적을 기록하는 한편, 백제가 멸망했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도성의 중심지에 있던 사찰의 석탑에 급하게 새겨둔 것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의 1층 탑신과 미석에 비명이 남아 있다. 글씨를 쓰기 위해 가로와 세로로 구획한 계선과 글씨를 새긴 후에 붉은 물감으로 채워 넣은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면석에 새겨진 글자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풍화와 박락으로 글씨의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곳곳에 있다.
당의 백제 정벌을 합리화하고 소정방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한 기공비라는 점에서 자료적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멸망 당시 백제의 정치상황과 지방 지배체제, 호구 상황 등을 알려주는 당대의 기록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한 동안 비명의 글씨를 명필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자획이 고르지 못하고 옹졸하여 서예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