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웅진(熊津) 우이(嵎夷) 출신으로 613년에 태어났다. 예식진(禰寔進)보다 2살 위의 형이다. 2011년 묘지명이 소개되어 구체적인 행적이 알려졌다. 묘지명은 중국 섬서성 서안시 남쪽의 예씨(禰氏) 가족 무덤군에서 발견되었고, 묘지명의 탁본이 중국 길림성 사회과학원 소속의 왕연룡(王連龍)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현재 묘지명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예군묘지명의 기록은 예식진묘지명의 내용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조부는 좌평 예(譽)이고, 부친은 좌평 선(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식진묘지명에는 예다(譽多)와 사선(思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표기일 것이다.
660년 7월 18일 아우인 예식진을 도와 의자왕을 사로잡아 사비성(泗沘城)에 주둔해 있던 당군 원수 소정방(蘇定方)에게 바쳤다. 이러한 공으로 당에 들어가 절충도위(折衝都尉)가 되었고, 좌융위낭장(左戎衛郎將)과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 겸(兼) 검교 웅진도독부 사마(檢校 熊津都督府 司馬)에 올랐다. 예군은 웅진도독부에 부임하여 왜(倭)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당시 당과 왜국 사이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왜와 친연관계가 있던 백제 유민을 활용하는데 앞장섰다.『삼국사기(三國史記)』와『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664년에 백제 좌평, 665년에는 웅진도독부 사마 직함을 가지고 왜에 사신으로 파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670년 7월신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신라를 정탐한다는 혐의를 받고 2년 동안 억류되었다. 672년 9월 신라에서 풀려나 당으로 돌아갔고, 그 해 672년 11월 21일에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에 제수되었다. 678년 2월 19일 장안성의 연수리(延壽里) 사저에서 향년 66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 고종 황제의 조서(詔書)로 그 해 10월 2일 장안성 남쪽의 고양원(高陽原)에 장례를 치렀다. 당 고종이 오랫동안 슬퍼했고, 견포(絹布) 300단과 조 3,000승(升)을 하사했다고 한다. 장례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관에서 지급하도록 하였고, 홍문관 학사 겸 검교 우위위장사(右威衛長史) 왕행본(王行本)에게 감호(監護)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