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남성 낙양시 서북쪽 전하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민 고덕(676~742)의 묘지명으로 낙양시 신안현 철문진에 있는 천당지재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지석과 개석이 모두 갖춰졌을 것이나 현재는 지석만이 남아 있다. 묘지명은 고덕의 선조가 발해인이라고 하였으나, 전체적인 내용상 당대에 고구려에서 망명한 귀족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묘지명은 맏아들 고등과 둘째 아들 고동이 함께 묘지명을 지었고, 부친인 고덕의 재능과 생애, 죽음과 장례에 대해 기록했다.
묘지명의 수제 바로 다음에 부군이 무예에 능통했음을 내세운 후에 묘주인 고덕의 생애에 대해 기술했다. 고덕은 자가 원광이고 발해 출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발해 출신이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후손들이 당대 명문 가문의 하나였던 발해 고씨를 칭한 것으로,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고구려인 또는 조선인 등으로 선조를 내세웠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고구려 멸망 후 세대가 흐르면서 고구려 귀속의식이 점차 약화된 것을 반영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묘지명에 선조들은 요양에 대대로 거주한 세족이었고, 수나라가 서고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원래 중국의 영역이었던 요양에 살던 조부와 부친은 당에 투항하여 금군이 되어 황제를 시위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요양은 다른 묘지명에도 자주 등장하는 지명인데, 구체적인 지역을 현재로서는 확정하기 어렵다. 대략 요동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덕의 선조들은 요동지역에 세거하다가 당에 투항한 것이다. 투항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개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 즈음의 일로 추정된다.
묘지명에 고덕의 자질에 대해서 기술한 바는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보다 빼어나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고 신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자질이 나중에 무장으로 발탁되었고 황제의 측근에서 호위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으로 묘지명에는 서술하였다. 고덕의 등용은 710년 중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워 평주의 백양진장에 제수된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부주 용교부 과의, 기주 두양부 과의를 지냈다. 이어서 섬주 만세부, 강주 장평부와 정평부, 회주 회인부, 동주 홍천부 등 5부의 절충을 역임하였고, 우무위 익부 낭장이 되었다가 정원장군 우용무군 익부 중랑으로 승진하였다. 자금어대 상주국의 훈관을 받았다. 직책은 외직을 제수받았으나 사냥과 순행에 동행하는 등 황제를 가까이서 호위하는 일을 맡았고 활과 화살을 지닐 수 있는 특전을 얻었다.
고덕은 이처럼 황제의 호위를 담당한 무인으로 활약했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예종과 현종대였다. 742년 2월 9일 당의 동도 낙양성 내 황궁 바로 서북쪽에 있는 도정리의 자택에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4월 23일 하남현 재택향에 묻혔다. 재택향은 낙양성 북쪽 망산의 전수 주변이다. 장례는 전 회주 회인부 별장을 지낸 아들이 주관했다. 묘지명 말미에는 명문을 써서 일생을 찬양하였다.
고덕의 선조와 생애, 장례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으로 지석만이 남아 있다. 아들이 묘지명을 직접 지은 흔치 않은 사례이다.
재질은 청석이며, 가로와 세로 45.5㎝로 정방형이지만, 아랫부분이 일부 손실되었다. 가로 24행, 세로 24행으로 괘선을 그어 구획한 뒤에 묘지명을 음각하여 새겨넣었다. 글씨는 행서체이다. 묘지명은 고덕의 아들인 고등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알 수 없다.
고덕 묘지명은 고덕 본인은 물론이고 조부와 부친이 당에 투항 후 협력했던 사실과 입당 이후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 금석문 자료로 멸망기 고구려와 당과의 관계 및 멸망 후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