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융 묘지명은 백제 의자왕의 태자로 웅진도독을 역임한 부여융(615~682)의 일생을 기록한 묘지명이다. 1919년 중국 하남성 낙양시 망산에서 출토되었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의 정방형에 가깝다.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27자씩 26행을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1919년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1920년 발견된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출토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지석의 크기는 가로 56.8㎝, 세로 대략 57.8㎝로 정방형에 가깝다. 개석의 크기는 지석과 거의 동일하며 녹정형(盝頂形)이다. 개석의 비탈면에는 사방에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고, 위면에는 전서체로 대당부여부군묘지(大唐扶餘府君墓誌)라고 3행 3자씩 모두 9자를 양각으로 새겨 넣었다. 재질은 석회암 계열로 청석이다. 묘지명은 현재 두 곳에 분리되어 보관되고 있다. 개석은 중국 하남성 낙양시 낙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지석은 정주시 하남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을 지은 이와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지 정확하지 않으나, 부여융의 장례를 담당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관리가 지은 것은 확인이 된다. 묘지명의 내용은 모두 26행이며 행당 27자를 가로와 세로로 계선을 긋고 그 안에 669자를 해서체로 써서 새겼다. 대개 3자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지석의 네 측면에는 모란문을 음각하여 장식하였다.
묘지명은 부여융의 장례를 치른 682년 12월에 만들어졌다. 원래 묘지명이 묻힌 곳은 장례를 치른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첫머리에 누구의 묘지인지 표제를 다는 다른 대부분의 묘지명과 달리 묘주의 이름과 출신을 먼저 밝혔다. 묘주인 부여융은 휘와 자가 모두 융(隆)이며 백제 진조인(辰朝人)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진조는 백제 건국 이전에 진국(辰國) 또는 삼한이 진국의 땅에서 나왔다는 출자인식의 표현으로 보고 있으나 분명치 않다. 선조에 대해서는 기록하였는데 백제국왕 장(璋)이 정관 연간(627649) 즉, 당 태종 즉위 초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에 책봉되었고, 부친은 의자로 현경 연간(65666)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위위경(衛尉卿)에 책봉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백제 무왕이 당의 대방군왕으로 책봉된 사실과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세상을 떠난 의자왕이 금자광록대부 위위경에 추증된 것을 말한다. 대개의 당대 묘지명이 선조를 기록할 때 증조부터 기록한 것과 비교해 조부만을 기록한 것은 부여융 가계의 특별한 사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부여융은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기개가 삼한을 덮을 정도라 명성이 양맥(兩貊)에 전해졌다고 하였다. 양맥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칭하는 말이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신중하여 선행을 행하고 의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병법을 배우지 않았어도 기묘한 계책을 낼 줄 알아서 당 황제에게 귀부하였다고 하여 백제 멸망 당시 투항한 사실을 미화하였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웅진도독 백제군공에 봉해져 백제 유민들을 안무하는데 종사하였다는 것과 신라와는 수호하였다고 하여 665년 취리산 회맹에 참여한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665년 말과 666년 정월에 당 고종을 따라 태산 봉선에 참여한 사실과 이후 대방군왕에 봉해진 것 등 당에서의 활동에 대해 이민족으로 당에 투항하여 충성하였다는 것을 진나라의 유여(由余)와 한나라의 김일제(金日磾)에 빗대서 기록했다. 그의 죽음과 장례에 대해서도 기록하였는데, 향년 68세인 682년에 사제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 해 12월 24일에 낙양 북망산의 청선리에 묻혔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의 사제는 낙양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당대 예법에 부친인 의자왕의 무덤 곁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가 묻힌 청선리는 부친 의자의 무덤이 만들어진 곳일 가능성이 크다. 묘지명의 뒷부분은 명(銘)을 기록하여 그의 선조와 일생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의 마지막 줄에는 묘지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제를 달아 밝혔다.
지금까지 알려진 당대 묘지명 중 제목이 첫머리가 아닌 마지막 행에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사례이다. 백제에서의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 이는 당에 투항한 대부분의 이민족 출신 인물들의 묘지명 기록상의 특징이다.
묘지명의 개석은 2014년까지 낙양 관림 내의 낙양고대예술관에 소장되었다가 2015년부터 낙양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지석은 개봉도서관과 개봉박물관을 거쳐 1998년부터는 하남박물원에 이관되어 보관되고 있다.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의 선조와 백제 멸망 후 일어난 부흥운동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웅진도독부와 당에서의 활동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 자료이다. 특히 입당 이후 부여융의 활동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