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오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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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의 지방행정구역.
내용 요약

백제 오방은 백제시대의 지방행정구역이다. 사비로 천도한 후 관제를 정비하며 방위에 따라 지방을 5개의 방으로 편제하였다. 5방은 동방 득안성(得安城), 서방 도선성(刀先城, 혹은 力光城),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혹은 卞城), 북방 웅진성(熊津城), 중방 고사성(古沙城)이다. 방 밑에 위치한 군을 전국에 편제하여 방과 여러 성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행정단위로서 기능하였다. 5방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은 7~10여 개의 군을 관할하였다. 백제 말기에 5부제(五部制)로 변경되었으나 성격은 변화하지 않았다.

목차
정의
백제시대의 지방행정구역.
개설

백제는 사비(泗沘: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 도읍한 뒤 관제를 정비, 지방을 5개의 방(方)으로 편제하였다. 방위에 따라 동방 득안성(得安城), 서방 도선성(刀先城, 혹은 力光城), 남방 구지하성(久知下城 혹은 卞城), 북방 웅진성(熊津城), 중방 고사성(古沙城)이다. 5방의 치소는 북방 웅진성은 지금의 공주(公州)를 말하며, 동방 득안성은 논산 근처로 추청되고, 중방은 고부로 비정된다. 서방 · 남방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내용

방성(方城)들은 모두 산의 험한 곳에 의지한 산성의 부류에 해당하며 석축(石築)된 것도 있다고 하였다. 또, 방에는 많으면 1천명, 적으면 7백∼8백명의 병력이 있고, 성안의 사람 수는 많은 곳은 1천명이며, 적은 곳은 7백∼8백명이 되며, 성안의 호수가 많은 곳은 5백가(家)에 이른다고 하였다. 각 방은 군장(郡將)이 다스리는 10여 개의 군(郡)을 통솔했으며, 그 밑에 성(城)이 있었다. 방 밑에 위치한 군은 전국에 편제되어 방과 여러 작은 성들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행정단위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방의 장관은 방령(方領)이고 달솔(達率)의 위계자가 맡았으며, 보좌관으로 방좌(方佐) 2명을 두었다. 군에는 군장 3명을 임명하였다. 각 방은 7∼10개의 군(郡)을 관할하였고, 5방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군 규모의 성(城)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小城) 또는 현(縣)이라 했는데, 그곳에 지방관 도사(道使)가 파견되었다. 소성(현)은 방성이나 군성에 통속되어 있었다. 이는 웅진에 도읍했을 때 전국을 22 담로(擔魯)로 구획해 자제종족(子弟宗族)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던 지방통치방법에서 방-군-성의 체제로 지방조직을 개편했음을 의미한다.

『주서(周書)』와 『한원(翰苑)』에 인용된 주1에 의하면, 왕성(王城)인 사비성의 크기가 방 1리 반(方一里半)이며, 1만여 가가 된다고 하였다. 중방 고사성은 사비 남쪽 26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150보(方百五十步)로 1,200명의 병력이 있었다. 고사성은 고사부리(古沙夫里)에 비정되는데 고사부리는 『고려사(高麗史)』『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고부(古阜)의 백제시대 명칭으로 나온다. 고사부리는 영역 확장과정에서 일찍부터 백제의 세력이 미친 지역으로 온조왕(溫祚王) 36년에는 성을 쌓는 등 중요한 거점으로 파악된다. 최근 발굴 조사된 고부 구읍성 출토유물 등을 검토해볼 때, 중방 고사성을 지금의 전라북도 고부로 보는 견해가 있다.

동방 득안성은 사비 동남쪽 1백리에 위치하며, 크기는 방 1리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은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남방 변성은 사비 남쪽 36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130보이다. 구지하성이라는 지명이 지리지나 사서 중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북 금구(金溝)나 전남의 구례, 광주 또는 남원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서방 역광성은 사비 서쪽 350리에 있으며, 크기는 방 200보이다. 서방에 대해서는 서산 · 당진 방면 또는 예산 · 대흥 방면으로 비정하거나 나주와 영암 또는 보령 지역에 비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북방 웅진성은 사비 동북 60리에 위치, 크기는 방 1리반이다.

이 5방의 특징은 왕도(王都) 이외에 전국의 동서남북 중의 중요한 거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국에 대한 균형적인 통제와 주변의 군과 성을 통괄할 수 있는 군사적 · 행정적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편제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남방은 5세기 후반 이래 편입된 영산강 유역에 대한 통치의 공고성을 위한 것이었으며, 신라와의 전쟁에서도 전진기지로서 중요시되었던 곳이다.

변천

5방제는 백제 말기에 와서 5부제(五部制)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성격의 변화는 없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상황은 5부 · 37군 · 200성(혹은 250현)이었고 주2는 76만호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주서(周書)』
『한원(翰苑)』
『백제의 중앙과 지방』(박현숙, 주류성, 2005)
『백제(百濟)의 영역확장(領域擴張)과 지방통치(地方統治)』(문안식, 신서원, 2002)
「백제의 지배체제 정비와 왕도5부제」(김영심, 『백제의 지방통치』, 학연문화사, 1998)
「百濟五方五部考」(今西龍, 『百濟史硏究』, 國書刊行社, 1934)
주석
주1

중국 당나라 때 복왕태(濮王泰) 등이 편찬한 지지. 정관(貞觀) 13년(639)을 기준으로 전국 358개 주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문물, 고적 따위를 기술하였다. 원본은 전하지 않으며, 청나라의 손성연이 여러 책에 인용된 것을 모은 것이 현재 전한다. 우리말샘

주2

집의 수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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