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는 형 비류, 오간(烏干) · 마려(馬黎)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각각 한강 유역인 위례성(慰禮城)과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하였다. 비류가 형, 온조가 동생으로 되어 있는 것은 두 집단이 연맹 관계에 있었는데, 미추홀에 자리잡은 비류 집단이 먼저 패권을 잡고, 위례성에 정착한 온조 집단이 나중에 주도권을 잡았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와 비류 외에도 『삼국사기』 「제사지」에는 중국 측 기록과 국내 고기류(古記類)를 인용하여 구태(仇台), 동명(東明), 우태(優台)를 백제의 시조로 전하고 있다. 건국 시조에 대해 다양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백제를 형성한 지배 집단의 계통이 복잡하고, 주민 구성도 다양한 것을 시사한다.
온조왕 즉위년조에 나오는 온조설화에 따르면, 시조 온조의 아버지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는 고구려와 연결되지만, 그 출자를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함으로써 고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온조 집단이 남하해 오기 전 한강 유역에는 한(韓) · 예(濊) 등의 주민 집단이 살고 있었다. 온조 집단이 위례성에 정착하여 주변의 선주 세력을 통합하고 나라를 세운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크다.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서기전 1세기경(서기전 18년)으로 보는 견해와 고고 자료에 근거하여 백제 토기가 3세기 중반경 성립되었고, 풍납토성이라는 대규모 성곽 시설이 3세기 중반 · 후반에 조영되었으므로, 건국 시기는 3세기 후반으로 보기도 한다. 건국 시기를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삼국사기』에 온조왕의 재위 기간인 46년 동안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46년간의 재위 기간에 말갈을 물리쳤다는 기록과 낙랑 · 마한과의 관계 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온조 13년조의 사방의 강역을 획정하였다는 기사나 온조왕 26 · 27년조에 나오는 마한 병합 기사는 백제가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던 일을 온조왕 재위 기간의 일로 한꺼번에 소급한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실제로 온조왕 13년조의 북쪽으로 패하(浿河: 예성강으로 추정), 남쪽으로 웅천(熊川: 경기도 안성천으로 추정), 서쪽으로 큰 바다, 동쪽으로 주양(走壤: 강원도 춘천으로 추정)까지 강역이 정해졌다는 기사는 3세기 또는 4세기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한 전체를 병합한 시기 또한 근초고왕 대나 그보다 늦은 시기로 보기도 한다. 온조왕 31년의 나라 안의 민호(民戶)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고 33년에 동부와 서부를 추가로 설치하였다는 기사나, 우보(右輔) 임명 기사 등도 통치 체제를 갖춰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절대 연대를 그대로 인정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