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이다. 즉위 후 왕권 강화·확립에 주력한 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했다.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을 영향권 안에 넣었고, 371년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 고지까지 차지하여 백제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무역기지를 확보하는 등 해상로를 장악하여 활발한 상업활동도 전개했다. 일본에 유학사상 등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기도 했으며 이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서기』라는 국사 책을 펴냈다.
재위 346∼375. 비류왕의 아들이다. 일본의 『고사기(古事記)』에는 ‘조고왕(照古王)’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초고왕(肖古王)’으로, 『진서(晉書)』 간문제기에는 ‘여구(餘句)’로 표기되어 있다.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에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 · 구수왕 앞에 ‘근(近)’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한편, 왕권 확립을 바탕으로 해 사방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경략 ·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영향권 내에 넣었다.
이렇게 남방 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 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기(精騎)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帶方)고지(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왕은 정복 활동과 더불어 대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한편,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이용해 고대 상업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대(漢代) 이후 중국 황해 연안에서 한반도의 서남 해안으로, 그리고 다시 일본열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는 한족의 동방 침입과 동시에 고대 상업로로서도 중요한 길이었다. 그런데 낙랑군 · 대방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고 북중국에는 수로(水路)에 익숙하지 못한 호족이 들어서게 되자, 이 전통적인 해상 교통로와 상업로는 백제가 계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백제는 요서 지역에 설치한 무역 기지와 한반도와 일본 지역에 자리잡은 백제계 세력들을 연결해 고대 상업망을 형성함으로써 무역의 중심 구실을 하게 되었다.
동시에 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 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해 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 좋은 예로는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지배 영역의 확대와 통치 조직의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왕은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