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에 소장된 백제 시대의 철제 가지모양의 칼이다. 전체 길이는 74.9㎝이고,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나뭇가지처럼 굴곡진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칼날 앞뒤 면에 각각 34자, 27자의 명문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고 명문 외곽에도 금선이 가늘게 상감기법으로 둘러져 있다. 명문을 통해 칠지도란 이름의 강철로 만든 칼이고 백제의 왕이 왜왕 지에게 하사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 외 제작 시기나 제작 주체와 관련한 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는 이설들이 있지만, 백제 왕을 근초고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철을 두드려서 만들었다. 전체 길이는 74.9㎝이다. 그 중 손잡이 내지 연결부를 뺀 칼날 부분이 66.5㎝이다. 칼의 양쪽 날 부분에 마치 소뿔이나 나뭇가지처럼 굴곡진 가지가 각각 3개씩 일정한 간격으로 뻗어 나와 있다.
이 같은 형태는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정확한 용도와 명칭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특히 명문이 발견되기 전에는 칠지도의 연결부에 주목해 이를 칼이 아닌 창으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1873∼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大宮司)로 있던 간마사도모(菅政友)가 칠지도에 붙어있던 녹을 닦아내다가 칼의 양쪽 옆면에 금(金)으로 상감(象嵌)된 명문(銘文)을 발견하였다. 이로써 이것이 칼이며, 제작 당시의 명칭이 칠지도였음이 분명해졌다.
명문은 한쪽 면에서 34자, 다른 쪽 면에서 27자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명문 외곽으로는 금선(金線)이 상감기법으로 가늘게 둘러쳐져 있다. 명문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34자가 새겨진 곳을 보통 표면(表面) 또는 앞면이라 부르고, 27자가 새겨진 곳을 이면(裏面) 혹은 뒷면이라 부른다.
명문이 분명하지 못한 곳이 적지 않아서 판독된 글자는 연구 시점과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상당수의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한 덕분에 근래에는 꽤 많은 부분에서 의견일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이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그러나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뒷면의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을 ‘백제왕이 다스릴 때 기묘하게 얻은 성스러운 소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성음’을 ‘성진(聖晋)’, 곧 중국의 동진(東晋, 317∼418)왕조로 판독한 뒤 ‘백제왕의 세자가 생(生)을 성스러운 진나라에 의탁하고 있으므로’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리고 ‘왜왕 지’를 ‘왜왕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명문이 매우 단조로운 표현방식을 따르고 있고, 주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명시되어 있으며, 명문의 궁극적인 목적이 명확한 뜻의 전달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기교를 버리고 매우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칠지도에 대한 학자들의 분분한 해석을 종합해보면, 논점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칠지도의 제작 시기를 알려주는 ‘태△ 4년’이 과연 언제인가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제작 주체, 곧 왜왕에게 칠지도를 만들어준 정치체가 과연 누구이며 어떤 목적을 담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태△’는 연호임에 틀림없는데, 어느 나라의 연호인지가 문제이다. 처음에는 태초(泰初) 혹은 태시(泰始)로 읽고, 중국 전진(前秦)의 태초(太初, 386∼394)라든가 서진(西晉)의 태시(太始 · 泰始, 265∼274), 남송(南宋)의 태시(泰始, 465∼471) 등에 주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근래에는 태화(泰和)로 읽고 위(魏)의 태화(太和, 227∼232), 동진의 태화(太和, 366∼371), 북위(北魏)의 태화(太和, 477∼499) 등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많은 편이다. 또한 ‘태△’를 백제의 연호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리고 명문의 ‘5월’을 6월 또는 4월로 판독하기도 하며, ‘16일’을 11일 또는 13일로 판독하는 사람도 있다.
대다수의 연구자는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준 백제의 왕이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간지(干支)가 딱 맞아떨어지는 전지왕(腆支王) 4년(408)이라든가 동성왕(東城王) 2년(480)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도 있다.
칠지도를 만든 주체와 목적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①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②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③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④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①설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神功紀) 52년조의 “백제의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 하나와 칠자경(七子鏡) 하나, 그리고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는 기사를 염두에 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신공기 기사가 매우 왜곡된 것이라는 데에는 학자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으므로, 오늘날에는 거의 부정되고 있다.
③설은 명문에 동진의 연호(태화)가 사용되었다는 점과 뒷면에 성진(聖晋)으로 읽을 수 있는 문자가 있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예가 적지 않고, ‘성진’보다는 ‘성음(聖音)’일 개연성이 더 높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다.
결국 칠지도 문제는 ②설 또는 ④설의 입장에서 검토해야 한다. ‘제후국의 왕’ 운운하는 문구가 있는 점, 왜왕의 이름 ‘지(旨)’가 거명된 점, 칼을 준 사람이 왕세자일 개연성이 높은 점,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는 문구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②의 백제왕 하사설이 상대적으로 더 타당한 듯하다.
한편 최근에 칠지도의 모양을 중국 산동성 가상현의 무씨사당화상석에 보이는 명협(蓂莢)과 연결시킨 연구가 주목된다. 육협(六莢)은 한 해를 의미하는데, 육협의 가운데 줄기를 세우면, 칠지도의 모양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칼의 모양을 달력을 상징하는 명협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칼을 만든 주체의 왕자적(王者的) 성격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