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사씨이다. 『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는 대좌평 천복, 『일본서기』 제명 5년 7월조에는 대좌평(大佐平) 사택천복(沙宅千福), 「 당평백제비(唐平百濟碑)」에는 사타천복(沙吒千福)으로 나온다. 사택 또는 사타씨는 사씨를 복성의 형태로 표기한 것으로, 웅진천도(熊津遷都) 이후 본격적으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사택천복 외에도 사택기루(沙宅己婁), 사택지적(沙宅智積) 등이 대좌평을 역임할 정도로 백제 멸망 때까지도 핵심적인 정치 세력이었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7년조에 따르면,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660년 7월 13일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의자왕은 여러 신하를 데리고 도망갔고, 대좌평이었던 사택천복은 의자왕의 아들 융(隆)과 함께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제명 5년 7월조의 세주에 인용된 『이길련박덕서(伊吉連博德書)』에는 11월 1일에 소정방 등에게 잡힌 백제의 왕 이하 태자 융 등 여러 왕자 13명,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國辨成)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정에 바쳤는데, 천자가 은칙을 내리고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당평백제비」에도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뒤 의자왕과 태자 융, 외왕 효(孝)를 포로로 잡아갈 때 대수령 대좌평 사타천복과 국변성도 모두 당에 연행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천복은 대수령(大首領)이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660년 7월 사비 도성이 함락될 때 왕과 함께 나와서 항복한 대표적인 귀족 관료로서, 660년 9월 3일 사비를 떠나 당으로 돌아가는 당나라 군대를 따라 낙양으로 끌려가서 11월 1일에 황제에게 바쳐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의자왕 20년조에는 왕과 왕자만이 아니라 대신과 장수 · 병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이 당나라 수도에 보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