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충청남도 부여군 현내면 궁북리부소산에 세워져 있던 것을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벽회색의 반점이 있는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이수(螭首)는 육룡(六龍)이 중앙의 주옥(珠玉)을 서로 다투는 모습으로, 당나라 초기의 웅려한 수법을 보여준다. 비의 높이는 3.35m, 두께는 31㎝이며, 이수의 높이는 114㎝, 너비 133㎝이다. 글자의 크기는 2.4㎝이며, 제액(題額)의 글자 크기는 6㎝ 정도인데 전서(篆書)로 양각되었다.
건립 연대는 663년(문무왕 3)경으로 추정된다.
비문의 전반부는 중간 중간이 마모되어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후반부는 더욱 심해 마지막 부분의 몇 자 외에는 완전히 마멸되어 알 수가 없다. 판독이 가능한 전반부 비문의 내용을 보면 유인원의 세계(世系)와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자(字)는 사원(士元)이고, 조음대빈인(雕陰大斌人)으로 오도독부가 설치되었을 때 낭장(郎將)으로 도성수위의 책임을 맡았다. 이때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의 부흥운동군에 의해 도성에 포위되었다가 유인궤(劉仁軌)가 거느린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구원되기도 하였다.
생애 부분 내용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게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과 관력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하였을 때 뛰어난 전공을 세워 우무위봉명부좌과의도위(右武衛鳳鳴府左果毅都尉)에 제수되었다. 647년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을 좇아 9성철륵(九姓鐵勒)을 안무하였다.
또, 651년과 657년(唐 高宗 顯慶 2)에도 각각 철륵을 안무하였다. 659년 토곡혼(土谷渾)과 토번(土蕃)을 선무(宣撫)했고, 660년 우이도행군자총관(嵎夷道行軍子總管)으로서 형국공(邢國公)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 멸망시킨 뒤 도호겸지유진(都護兼知留鎭)으로서 백제의 옛 땅의 민심을 다스리면서 백제 부흥군을 격파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비문의 마멸로 더 이상 알 수 없다. 이 비는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기는 하지만, 그가 백제 옛 땅의 진수 책임자였고, 또 백제부흥운동군과의 전투 및 신라와의 관계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 데에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