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현은 백제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용 목책으로 축조한 요충지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01년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660년 흥수가 의자왕에게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1만 명을 막을 수 있는 곳이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흥수의 조언을 듣지 않아 탄현을 넘어 온 신라군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와 싸워 승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흔하게 사용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에 위치 비정이 쉽지 않아 논란이 분분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충남 공주와 부여, 전북 완주에 탄현 지명이 남아 있다.
탄현(炭峴)은 백제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시설을 구축한 요충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따르면, 501년(동성왕 23) 7월에 탄현에 목책을 설치하여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또한 660년 백제 멸망 당시 충신 흥수가 의자왕(641~660)에게 조언할 때도 ‘백강(白江)과 탄현[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했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여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으로 막아도 1만 명이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뽑아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사가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고 신라 군사가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대왕은 여려 겹으로 막아 굳게 지키다가 적의 군량이 다 떨어지고 사졸이 피로함을 기다린 연후에 힘을 떨쳐 치면 반드시 깨뜨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흥수의 조언을 듣지 않은 까닭에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 5천과 싸워 승전하게 되었다.
탄현의 위치에 대한 학계의 견해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대전시 동구와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의 마도령(馬道嶺)을 탄현으로 비정하였다(池內宏 · 서정석).
둘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에 있는 쑥고개로 보기도 한다(홍사준 · 정영호 · 조성욱).
셋째, 충남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숯고개[炭峙]’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성주탁).
기타, 금산군 진산 방현리와 행정리 사이의 방현(方峴)을 주목하기도 했다(이판섭).
‘탄현’은 고개의 일반명사로서 흔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 때문에 그 위치 비정이 쉽지 않고 학계에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우만 해도 충남 공주와 부여, 그리고 전북 완주군에 속한 고산현조의 3군데에 탄현 지명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일단 공주와 부여조에 있는 탄현은 당시 백제의 외곽 경계로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탄현의 위치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대전과 옥천의 경계에 있는 식장산 마도령의 경우 당시 신라와 백제의 대치선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충분하다. 다만 ‘탄현’이라는 명칭과의 정합성이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렇게 보면 둘째셋째에 해당하는 완주군 운주면 삼거리와 금산군 진산면 교촌리의 탄현이 유력한 후보지가 될 것이다. 67세기 백제의 방어체계와 지정학적 조건을 고려할 때 진산면 일대가 탄현의 위치와 부합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향후 좀 더 면밀한 검토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