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善化公主)라고도 표기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절세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이 신라의 수도로 몰래 들어와서는 아이들에게 마[薯蕷]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는데, 귀양 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서동이 묻어 놓은 막대한 황금을 꺼내 보이자 이를 신라 왕궁에 보내 부왕의 노여움을 풀고, 또한 자신들의 결합을 정식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주 부부가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 금의 수송을 의논했더니, 법사가 신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금을 신라 왕궁으로 운반하였다. 이로써 서동은 진평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 사람들의 인심을 얻게 되어 마침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무왕이라고 한다.
무왕 부부는 뒤에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나타난 미륵삼존(彌勒三尊)의 영험에 따라 이 곳에 미륵사(彌勒寺)를 지었는데, 진평왕이 온갖 종류의 장인을 보내 도와 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설화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緣起)가 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즉, 이병도(李丙燾)는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 · 백제 두 나라의 관계는 원수 사이였으므로 이 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없었다고 하며, 이는 어쩌면 493년(동성왕 15)에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이 통혼한 사실을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이벌찬(伊伐飡) 비지의 딸이 되는 셈이다.
한편, 일본 학자 세키노(關野貞)는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후반으로 내려보는 입장에서, 삼국통일 직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군의 중심 인물이었던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회유해 신라 쪽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 곳에 보덕국(報德國)을 만들어 그를 국왕으로 삼고 문무왕의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았던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초, 즉 무왕 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져 이 설화가 가지는 역사성이 뜻밖에 높은 듯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