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서탑 금제 사리봉안기는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삼국시대 미륵사 사리봉안 기록이다. 2009년 미륵사 서석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가로 15.5㎝, 세로 10.5㎝이고 두께는 1.3㎝쯤 된다. 금판 앞면과 뒷면에 각 11행에, 한 줄에 9자씩, 앞면 99자, 뒷면 94자, 총 193자가 새겨져 있다. 미륵사 창건의 구체적 연대, 역사적 인물과 '폐하'와 '즉신' 등의 용례 등 백제사의 다양한 측면을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의 내용과는 달리 미륵사 창건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의 사택왕후로 기록되어 있다.
2009년 1월 14일 미륵사 서석탑 심주석 사리공 안에 안치된 금제사리봉안기를 발견하였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이고 두께는 1.3㎝쯤 된다. 금판 앞 · 뒷면에 각 11행에, 한 줄에 9자씩, 앞면 99자, 뒷면 94자, 총 193자를 새겼다. 뒷면 3행은 8자로 썼다가 나중에 1자를 중간에 삽입하였다. 앞면에는 붉게 주칠을 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히 드러나게 하였다. 문장은 46변례체로 유려하다.
원문은 내용에 따라 4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문단은 법왕이 세상에 나와 3천대천세계를 이롭게 한 인연을 말하였다. 두 번째 문단은 사택적덕의 따님인 사택왕후가 선한 인연으로 정재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39) 정월 29일 사리를 봉안했다고 하였다. 세 번째 문단은 가람을 세운 공덕으로 대왕폐하가 수명이 산악처럼 오래가고 정법이 펼쳐져 창생을 교화하게끔 해달라는 기원을 담았다. 네 번째 문단은 왕후의 마음은 수경과 같고 몸은 금강과 같아 불멸하시니 모든 중생들이 불도를 이루기를 빌고 있다.
각 문단에서 주목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단의 법왕은 석가모니를 말한다. 금제사리봉안기를 만든 시기는 무왕 때인데 무왕은 부왕의 시호를 법왕으로 올린 바가 있다. 무왕은 부왕의 시호를 법왕이라 했고 사리봉안기에도 석가모니를 법왕이라 칭하였다. 곧 백제 법왕의 시호에 대해서 이전부터 유교적 의미인지 불교적 의미인지 논란이 있었는데 금제사리봉안기의 발견으로 후자인 불교적 의미임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번째 문단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사택적덕과 사택왕후가 주목된다. 사택씨는 백제 대성8족의 하나로 의자왕 때 대좌평을 지낸 사택지적이란 인물도 있었다. 특히 새롭게 백제 왕비로 알려진 사택왕후가 미륵사 창건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기존에는 미륵사가 신라 선화공주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미륵사 창건연대도 기존의 무왕 초반이나 적어도 634년 이전에 완공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여기선 기해년(639) 정월 29일로 밝혀져 미륵사 창건연대와 미륵사 석탑의 창건연대에 대한 기존의 설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세 번째 문단은 '대왕폐하'란 용어다. 삼국이 황제체제를 지향한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선 지금까지 구체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았다. 무령왕릉 지석에 '붕'이란 용어가 쓰였지만 지석에 무령왕이 양나라로부터 받은 '영동대장군'이란 작호를 칭하고 있어 주저되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금제사리봉안기는 백제의 무왕을 '대왕폐하'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의 왕을 황제란 칭호와 같은 의미인 '폐하'로 부른 사례는 이것이 유일하다. 곧 '대왕폐하'란 말을 통해 백제 무왕이 황제체제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네 번째 문단은 사택왕후를 부처와 같이 고귀한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왕후즉신'의 즉신(卽身)이란 존칭어미는 사리봉안기에 처음 보이는 용례로 우리나라에서 쓰인 극존칭의 중요한 사례로 보인다. 논자에 따라선 즉신을 부처를 이뤘다는 '즉신성불'의 '즉신'이란 의미로 보기도 한다.
이처럼 미륵사서석탑금제사리봉안기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미륵사 창건의 구체적 연대, 역사적 인물과 '폐하'와 ‘즉신’ 등의 용례 등 백제사의 다양한 측면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미륵사의 창건주체와 창건연대는 『삼국유사』이래 1천4백년 동안 알려진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와 충돌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논란과 쟁점의 대상이 되어 왔다.
13세기에 편찬된 『삼국유사』와 7세기 백제인들이 남긴 금제사리봉안기가 서로 다른 내용을 전할 때 후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미륵사를 창건한 사택왕후는 익산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으로 무왕 말년 그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금제사리봉안기의 내용 가운데 이해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익산 미륵사는 미륵 하생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 창건되었다.
백제는 598년 위덕왕, 599년 혜왕, 600년 법왕이 해마다 1명씩 죽어나갔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바로 그곳이 익산이었다. 익산 미륵사는 3 탑 3 금당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데 이는 미륵이 하생하여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제도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미륵사 창건의 내역을 적은 금제사리봉안기에는 미륵이 등장하지 않고 법왕이 등장하고 있다. 미륵사란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미륵사는 미륵이 중심이다. 그렇다면 미륵사의 가운데 목탑은 미륵신앙를 내세운 사람에 의해서 지어졌을 가능성이 있고 그 유력한 후보자는 선화공주로 볼 수도 있다. 『삼국유사』와 금제사리봉안기 가운데 하나를 절대적인 자료로 내세울 것이 아니라 서로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는 자료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