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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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흥사지
부여 왕흥사지
건축
유적
문화재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사적.
이칭
이칭
미륵사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01년 02월 05일 지정)
소재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번지
목차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사적.
개설

절터에서 발굴된 사리함에는 창왕이 정유년(577)에 죽은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하였다. 절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법왕이 세우고 무왕이 완공한 절이라고 하여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내용

1934년 '왕흥(王興)'이라고 찍힌 고려시대 문자와편이 수집되어 일찍부터 왕흥사지로 비정되었는데 2000년부터 연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점차 사원의 면모가 드러났다. 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고, 통상적으로 중문이 위치하는 장소에 T자형의 석축이 있으며, 사역의 서쪽 경계로 생각되는 지점에서 배수로와 별도의 진입시설이 확인되었다. 목탑지는 14x14m의 정방형 건물지로 이중기단으로 추정된다. 그 중앙에 심초석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기단토 상면에서 50㎝ 지하에 위치한다. 이 심초석의 남쪽 중앙에 사리공(16x12x16)을 마련해 사리기를 봉안했으며, 주칠(朱漆)로 문양을 그린 우진각지붕 모양의 화강암 뚜껑을 덮었다. 청동제 사리함기에는 탑의 축조연대와 건립연유를 기록한 명문이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동서 22.7m, 남북 16.6m의 장방형 건물지로 바깥쪽 기단은 백제시대, 안쪽 기단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강당지의 남쪽 기단은 가국식기단이지만 나머지는 할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기단이다. 내부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1동 2실 건물이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다. 최근 조사에서는 가람 중추부 외곽에서 또 다른 건물지, 즉 동서 외곽건물지가 대칭을 이루면서 배치된 새로운 변화도 함께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들은 아직 정확한 규모나 구조를 알 수 없지만 회랑 안쪽의 건물들보다 격이 낮으면서도 동서 경계 축대의 안쪽에 독립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동서 외곽 건물지의 성격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발굴 조사의 진전을 기다려야 하지만 공간 배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익산 미륵사지의 삼원병렬식 가람배치의 초보적인 형태로서 '별원(別院)'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왕흥사지에 관한 가장 큰 논란은 창건연대이다. 발굴된 사리함기에는 창왕 정유년(577)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세웠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600년(법왕 2)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건하였고 30명이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하였고 634년(무왕 35) 왕흥사가 낙성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도 법왕이 터를 닦고 무왕이 완공했다고 하면서 완공되었을 때 이름은 미륵사라고 하였다.

왕흥사사리함기에 따라 왕흥사는 창왕이 창건한 것이며 문헌기록에 나오는 법왕과 무왕 때의 왕흥사는 익산의 미륵사를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사리함기에는 특별한 사찰명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 절은 창왕 때 세웠지만 법왕과 무왕 때 중창하면서 절의 이름을 왕흥사로 바꾸었다고 보기도 한다. 무왕 때 왕흥사를 완공하고 한때 미륵사라고 한 것은 법왕의 미륵상생왕생을 기원하려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왕흥사는 특별히 백마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절에 갈 때는 배를 타고 가는데, 속세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건너가는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백제 불교사원의 성립과 전개』(이병호, 사회평론, 2014)
『왕흥사지3·4』(국립부여분화재연구소, 2009·2012)
「백제 왕흥사의 창건과정과 미륵사」(조경철, 『사총』70, 2010)
「백제 왕흥사의 창건과 변천」(양기석, 『백제문화』41, 2009)
문화재청(www.cha.go.kr)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조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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