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전국의 폐사지로서는 최초로 일본인 이시다 모사쿠[石田茂作]에 의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가람배치가 확인되었고 납석제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불상 2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와당을 비롯한 연화문과 인동문이 아름답게 돋을 새김된 상자형 벽돌 등의 귀중한 기와와 벽돌이 출토되었다. 조사결과 백제의 가람배치가 일본의 시텐노지[四天王寺]식 가람배치와 일치한다는 것과 더불어 그 출토유물이 아스카[飛朝]문화와 직접 연결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부여지역 폐사지에 관한 발굴은 당시 일본학계의 관심이었던 아스카 문화의 원류에 관한 해명이나 ‘호류지 재건 비재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부여와 아스카 양 지역 사원의 공통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던 것은 큰 문제라 할 수 있다.
2003년 궁남지의 종합정비계획에 포함되어 2005년부터 정확한 가람배치와 규모를 확인하고자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2005~2007년 3년간에 걸쳐 금당지, 목탑지, 동편일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군수리사지에서는 강당지에 대한 재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건물지 내부 초석의 배치 상태를 알 수 없었는데 일제강점기의 조사결과를 보면 군수리사지는 동서회랑지 북단에 동당과 서당, 그 외곽에 또 다른 동방기단 건물지로 불리는 별도의 건물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군수리사지는 사비 천도이후 정림사지의 건립 과정에서 성립된 정림사식 가람배치를 기본형으로 하면서도 동서회랑지의 외곽에 새로운 기능을 가진 건물들이 부가되는 새로운 변화를 보인다. 군수리사지는 와당을 비롯한 출토유물, 심초석과 사리의 안치방식, 건물지의 배치 등에서 볼 때 능산리사지와 왕흥사지의 중간 단계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수리사지는,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일직선상에 놓이는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이다. 강당 좌우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물이 대칭으로 위치하며, 추정 동회랑지 동쪽 외곽에는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회랑 부분은 불분명하다. 중문지목탑지, 목탑지금당지, 금당지~강당지의 중심간 거리의 비례는1:1:1.5이다. 강당 좌우에 건물이 배치되는 곳은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왕흥사지, 능산리사지가 있다. 군수리사지와 능산리사지는 좌우 건물지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군수리사지에서 특징적인 것을 살펴보면, 첫 번째는 기단 가장자리를 와적기단과 전적기단으로만 구축하였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모든 건물지에 기단 가장자리에 기와나 전돌을 사용하여 구축된 사례는 확인되지 않았다. 두 번째는 금당지에서 차양칸이 설치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금당지에서는 황룡사지와 군수리사지에서만 차양칸이 확인된다. 차양칸은 건물의 구조를 반하는 것으로 볼 때 다른 사찰 의금당지 구조와는 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는 동회랑지 외곽에 별도 건물지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건물지는 왕흥사지에서도 확인되었다. 군수리사지에서도 이러한 건물이 좌우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3금당의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판단된다. 네번째는 목탑지 심초석 사도를 조성하였다. 이는 지하식 심초 구조에서 심초의 안치, 심주 입주, 진단의식 등 일련의 과정들을 복원할 수 있는 시설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