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막성전투 ()

남원 아막성 성벽
남원 아막성 성벽
고대사
사건
602년 8월 신라가 남원 운봉 아막성(阿莫城)에서 백제군과 치른 전투.
이칭
이칭
모산성전투(母山城戰鬪)
정의
602년 8월 신라가 남원 운봉 아막성(阿莫城)에서 백제군과 치른 전투.
개설

아막성은 경상남도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인 팔량치 고개에 위치한다. 해발고도는 513m이고, 북쪽의 상산(霜山)과 남쪽의 삼봉산(三峰山: 1,186m) 사이의 안부에 있다. 602년 아막성 공방전에서 신라는 백제 무왕이 보낸 대군을 맞아 반격을 감행하여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601년 왜(倭)가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를 협격할 것을 제안한 기록이 등장한다. 601년고구려·백제·왜 삼국이 신라를 협격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음을 알 수 있다. 602년 4월 왜가 병력 2만 5천을 큐슈〔九州〕지역에 집중시켰으며 신라에 상륙하기 위한 선박도 마련하였다. 백제도 병력 규모 4만을 갖추었는데, 이는 일순간에 동원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을 두도 철저히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는 이들을 각개 격파해야만 하는 위기상황에 처해 있었다.

고구려·백제·왜가 신라를 협격하려던 순간 2가지 중대한 대외변동이 있었다. 602년 초반 수(隋)의 지원을 받던 동돌궐(東突厥)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서돌궐(西突厥)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격퇴시키고 승리했다. 초원에 대한 수나라의 영향력이 한층 확대되자 수와 적대적인 고구려는 직후의 정황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수가 서돌궐을 격파한 동돌궐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지만 고구려의 신라 공격을 유보시키기에는 충분한 일대 사건이었다.

한편, 602년 6월 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동생인 내목황자(來目皇子)가 병석에 누웠다. 왜군의 신라출병도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제가 단독으로 신라를 먼저 공격했는데, 아막성전투는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발발하였다.

경과

602년 8월 백제 무왕은 지리산을 돌파하여 남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단의 군사를 출동시켜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요충지인 아막성을 포위했다. 이에 신라 진평왕은 포위된 아막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의 기병을 급파했다.

신라 원군이 백제군을 격퇴시키고 아막성의 포위를 풀었다. 직후 신라의 새로운 대규모 원병이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 가운데 귀산(貴山)이라는 청년 장교가 있었다. 신라 원군은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아막성 서쪽 앞에 소타(小陀)·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개의 요새를 건설했다. 아막성은 4개의 자성(子城)을 거느린 모성(母城)이 되었다. 이후 아막성은 모산성(母山城)이라 불리었다.

방어망을 보강한 신라군은 백제에 대해 역공을 단행했다. 아막성에서 남원 방향으로 진격한 것이다. 신라군이 몰려오자 백제 무왕은 좌병(佐平) 해수(解讐)에게 4만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케 했다. 남원과 운봉의 광활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그 가운데 천산성(泉山城) 부근의 전투가 특히 치열했다. 백제의 유인술에 걸린 신라군이 늪지까지 들어갔고, 철수를 단행하려다 백제군의 역습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신라 장군 무은(武殷)이 백제군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아들인 귀산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동료인 추항(箒項)과 함께 뛰어들었다. 귀산·추항을 둘러싸고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는데, 후퇴하면서 이 장면을 목격한 신라군이 귀산과 추항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진격했다. 아버지를 구하려는 귀산의 혈투가 신라군을 분발시켰고, 여기서 아막성전투의 승기를 잡았다. 결국 백제의 4만 대군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신라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결과

아막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자 603년 7월 왜의 신라침공계획은 취소되었다. 그해 8월고구려가 신라 서북의 본영인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했지만 진평왕이 친히 병력 1만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나타나자 위세에 눌린 고구려군은 철수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602년 고구려·백제·왜 3국의 협공계획은 신라에게 있어 최대의 위기였다. 국제정세의 변화가 신라의 위기 국면을 타개하게 한 것도 있지만 아막성에서 신라군이 백제 대군을 맞이하여 수세적인 입장에 있지 않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격파했던 점은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의 흥망과 전쟁』(문안식, 혜안, 2006)
「아막성 전투와 왜」(서영교,『동국사학 학술발표요지』2011.7.)
「백제 무왕의 대야성 진출 기도」(김주성,『백제연구』49, 2009)
「백제 무왕대의 아막성 전투 과정과 그 결과」(김병남,『전남사학』22, 2004)
「백제 영토변천사 연구」(김병남, 전북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
「백제 무왕의 치적」(김주성,『백제문화』27, 1998)
『日本書紀』
『百濟史硏究』(今西龍, 京城 近澤書店,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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