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55년~475년이며, 비유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요충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북위와 협력관계를 만들고자 외교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왕궁을 화려하게 짓고 대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배제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 내부의 결속을 와해하고 왕실의 영도력 자체를 약화시켰다. 475년 백제의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면서 고구려에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반면, 도림의 계략만을 중요시해 단순화되었으므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 청목령(靑木嶺 : 현재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됨)에 대책(大柵)을 설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을 보고하며 설득하였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宋)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제라동맹(濟羅同盟)의 유지 · 강화에도 힘썼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 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고심했음에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졌고 도성이 공격당해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는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 뒤의 문주왕)와 여곤(餘昆 : 문주왕의 아우이자 동성왕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上佐平)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개로왕이 왕궁을 장려하게 짓는 등 큰 토목공사를 일으킨 것도 왕의 권위를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구래의 대 귀족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는 가운데 그들을 배제시킨 채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한 것은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을 와해시키고, 백제 왕실의 영도력 자체도 약화시켰다. 개로왕은 백제사람으로서 고구려에 망명해 고구려군의 선봉장이 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爾萬年)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그리고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하자 구래의 대귀족인 해구(解仇)의 반란이 있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 중심 정권 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키워냈고, 그로 인해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 건축 등을 강행해 하층민을 위시한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의 개루왕은 고구려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장지는 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