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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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고대사
인물
고구려의 제20대(재위: 413년~490년) 왕.
이칭
시호
강(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394년
사망 연도
491년
내용 요약

장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13~490년이며 광개토왕의 장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다각적인 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서방의 안정을 기했다. 이를 토대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고 427년에는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신라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하다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자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시기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왕으로 98세에 서거했다.

정의
고구려의 제20대(재위: 413년~490년) 왕.
개설

재위 413∼491. 본명은 거련(巨連) 또는 연(璉).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408년(광개토왕 18)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중국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당시 북중국은 여러 이민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 북위(北魏)에 의해 통일되었고, 남중국은 한족에 의해 동진(東晉, 317∼420) · 송(宋, 420∼479) · 남제(南齊, 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에 동진에 사절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의 교섭을 재개하였다. 이후 송 · 남제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북위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북위가 북중국의 강자로 부상됨에 따라 435년(장수왕 23)에는 북위에 사절을 파견해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436년 북위의 군대에 쫓긴 북연(北燕)의 왕 풍홍(馮弘)이 고구려 망명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북위의 풍홍 소환 요청을 거절하고, 466년 북위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는 등 자국의 이해 여부에 따라 외교 관계를 달리하였다.

그리하여 북위와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된 적도 있었고, 440년부터 461까지 20년간 사절의 교환이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북위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백제가 북위에 접근을 시도한 472년 이후부터는 매년 2차례 이상 사절을 파견하는 등 북위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북위와 적대 관계에 있는 북아시아 유목민족인 유연(柔燕)과도 관계를 가졌다. 479년에는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일대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의 분할 점령을 꾀하고 거란족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장수왕은 중국 및 북아시아의 여러 세력들과 다각적인 외교를 통해 서방의 안정을 이룩하였다. 또한 이를 토대로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였다.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 : 지금의 吉林省 集安縣)에서 평양성(平壤城 : 지금의 평양 시가지 동북방 6∼7㎞ 지점에 위치한 大城山城 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 · 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의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475년에는 승려 도림(道琳)을 이용해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의 도읍을 웅진(熊津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기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백제 및 백제와 교류하는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해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해 빼앗았다.

481년에는 호명성(狐鳴城 : 지금의 경상북도 靑松郡 虎鳴山?)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 ·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장수왕이 491년에 98세로 죽자, 북위는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을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이것은 북위가 이민족에게 수여한 추증 가운데 가장 높은 것으로서, 장수왕에 대한 북위의 평가를 짐작하게 한다.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있는 장군총(將軍塚)이라는 견해와,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에 위치한 진파리고분군의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이라는 견해, 그리고 평안남도 평성시 경신리에 위치한 경신리1호분(전 한왕묘)이라는 견해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위서(魏書)』
『진서(晋書)』
『남제서(南齊書)』
「고구려 평양천도의 동기」(서영대, 『한국문화』 2, 1981)
「長壽王征服地域考」(津田左右吉, 『朝鮮歷史地理』, 1913)
「北魏の對外政策と高句麗」(三崎良章, 『朝鮮學報』 102, 1983)
「長壽王の東アジア認識」(武田幸男, 『高句麗史と東アジア』,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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