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9.3㎝.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1968년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普願寺址)에서 발견되었다. 두 발 이하를 잃었으나 금도금이 양호하게 남아 있고 조각 수법이 정교한 초기 백제불의 귀중한 예이다.
소발(素髮)의 머리 위에는 높고 큼직한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모가 난 듯한 직사각형의 긴 형태이다. 코와 입술이 손상되었으나 고졸(古拙)한 미소가 엿보인다. 신체는 세장(細長)한 편이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두껍다. 그래서 어깨 이외에는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옷자락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차 넓게 퍼지면서 두터워진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연속된 V자형의 옷주름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 1964년 지정)이나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1962년 지정) 같은 6세기 금동불과 비슷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 준다.
그러나 몸 양쪽으로 예리하게 퍼진 새 깃 같은 옷자락이 없어지고, 양 팔목을 감싸고 내린 옷자락 끝은 Ω형으로 주름 잡혀 극도로 장식화되어 있다. 가슴 사이로 드러난 내의는 V자형으로 처리되었다.
이와 같이 몸 양쪽의 누그러진 옷깃과 옷 끝단의 장식화는 앞으로 약간 숙인 얼굴 모습과 함께 중국 북위시대 산둥 지방의 이른바 정광양식(正光樣式, 510∼520년)의 요소를 반영한 것이다.
두 손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통인(通印)을 맺었으며, 여원인을 한 왼손은 끝의 두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신(佛身)은 하체로 내려갈수록 두께가 얇아져 평면적이다. 속이 비어 있는 뒷면에는 아래와 위 두 곳에 광배를 꽂았던 촉이 달려 있다.
이 상이 출토된 보원사지는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옛 백제의 절터로서, 인접한 곳에 서산용현리마애불 같은 백제시대의 기념비적인 불교 유적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태안반도를 통하여 중국 남조와 활발히 교류하던 6세기 후반에 중국의 불상 양식을 받아들여 제작된 백제불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