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 「백제전」에 따르면, 개로왕은 458년(개로왕 4) 중국 송나라에 11명의 신하에게 작호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정로장군(征虜將軍)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이 바로 곤지로 추정된다. 신하 11명은 개로왕의 즉위에 도움을 준 이들로, 그 가운데에서도 곤지에게 최고위직인 좌현왕 제수를 요청하였다는 점에서 큰 공훈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좌현왕은 흉노에서 보이는 직책으로 선우를 이을 수 있는 왕위 계승의 우선권을 가지며, 군사권을 가졌다. 곤지 또한 군군(軍君)이라 불렀다는 점에서 흉노의 좌현왕과 비슷한 지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곤지의 서열이 개로왕의 뒤를 이은 형인 문주왕보다 높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곤지는 461년 왜국으로 파견되는데, 파견 이유는 고구려의 남침 때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사로 본다. 또한, 곤지를 왕권의 핵심에서 배제하려는 정략적 추방설도 제기되었다. 더불어 곤지가 가족을 데려간 점, 정착한 곳이 도읍인 야마토〔大和〕가 아닌 가와치〔河內〕라는 점에 주목하여 백제계 이주민들을 규합하여 왜와 군사적 협력체제를 구축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곤지는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의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조〔河內飛鳥戶造〕의 선조이며,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河內飛鳥戶〕 신사의 제신(祭神)이라는 점에서 그의 후예 씨족들이 지금의 가와치 아스카군〔河內安宿郡〕 일대에서 번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사 뒤편의 산에 아스카센즈카〔飛鳥千塚〕라 불리는 수백 기의 백제계 굴식돌방무덤이 분포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곤지가 귀국한 시점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477년 문주왕이 내신좌평으로 임명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를 전후로 한 시기에 귀국하여 웅진에 입성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내신좌평에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곤지의 죽음에 관해서는 검은 용이 출현한 직후 사망한 것으로 기술되어 웅진 천도 초기에 약화한 왕권과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정국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