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금제 관식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의 금제 관식이다. 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관식은 왕의 나무널 내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2매가 발견되었다. 금을 두드려 2㎜의 순금판을 만들고 문양의 나머지 부분을 오리는 투각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전체적으로 불꽃 형상을 만들고 날개 장식을 달았다. 관식의 윗부분에는 만개한 측면의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 무령왕 금제 관식은 지금까지 백제 왕의 관식으로 발견된 유일한 예이다. 『삼국사기』에서 백제왕은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쓴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5호 무덤과 6호 무덤 사이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지석을 통하여 501년에서 523년에 재위하였고 525년 매장된 무령왕과 529년에 매장된 왕비의 부부묘로 밝혀졌다.
무덤 내부의 왕과 왕비의 나무널[木棺] 밑 부분에는 관식을 비롯하여 목걸이, 귀걸이 등의 다양한 장신구와 부장 유물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금제 관식은 연도(羨道) 쪽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왕의 시상대에서 2매가 포개어진 채 출토되었고, 그 밑으로 크기가 다른 오각 금판 7매가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관의 부속구로 추정되는 거치형(鋸齒形) 금장식 2점과 황색, 청색 등의 유리 소옥들도 확인되었다.
무령왕 금제 관식에서 연화문과 결합된 팔메트는 화염문과 같은 형태이다. 중심축이 이동된 상태에서 대칭으로 장식되었는데, 팔메트는 반쪽이 생략된 반팔메트이다. 날개와 같이 대칭으로 펼쳐진 팔메트의 형식은 기본적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계열로 생각된다. 사산조 계열의 팔메트 형식은 남조와 북조 모두에서 발견된다. 관식의 윗 부분에는 만개한 측면의 연화가 장식되어 있다.
관식은 금을 두드려 모두 2㎜의 순금판을 만들고 문양의 나머지 부분을 오리는 투각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러한 기법은 공주 수촌리 Ⅱ호 석실분, 서산 부장리 5호분 등 한성시기에서 공주시기로 추정되는 금동모에서도 흔히 확인되는 기법이다.
무령왕의 금제 관식이 팔메트와 연화문의 식물문으로 구성된 것은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이왕(古爾王) 28년(261)조에는 왕은 자색 대수포에 청금고를 입고 금화를 장식한 오라관과 소피대, 오위리를 갖추고 남당에 앉아 정사에 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전(東夷傳) 백제조(百濟條)에서는 왕은 금꽃으로 장식한 오라관을 쓰고 신하들은 은꽃으로 장식한 관을 썼다는 기록이 발견이 된다. 이 관식은 바로 왕이 착용한 금화, 즉 오라관에 장식된 금꽃으로 이해된다.
무령왕은 고구려에 의한 한성 함락이라는 국가적 시련을 이겨내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 국내적으로 왕권을 안정시킨 임금이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중국 양(梁)과 왜 등과의 활발한 대외 교섭을 통해 적극적으로 국제적인 문물 교류를 시도한 왕이다.
새로운 시대를 연 무령왕의 관식으로 국제적으로 새로운 도상인 팔메트와 연화문으로 채택된 배경에는 무령왕대에 신장되기 시작한 불교와 관련지어 보기도 한다.
남북조시대에는 연화와 팔메트는 모두 서역에서 수용된 식물문으로 생명, 재생, 광명 그리고 불국토에서의 화생의 의미로 수용되었다. 남북조시대에서 확인되는 팔메트와 연화문이 결합된 문양은 고구려와 백제 모두에게 전해졌다.
무령왕의 금제 관식의 계보와 관련하여, 관식이 화염문의 형태를 가진 점이 주목된다. 이는 고구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화염형 팔메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령왕 금제 관식은 지금까지 백제 왕의 관식으로 발견된 유일한 예이다. 이는 『삼국사기』나 『신당서(新唐書)』 등의 사료에 등장한 백제왕이 착용한 금꽃의 실체를 확인시켜준 예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무령왕의 금제 관식이 전체적으로 화염의 형상을 한 것과 관련하여 팔메트와 연화문의 조합이 고구려를 통해 전해졌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팔메트와 연화문의 조합은 중국 북조와 남조 모두에서 확인되지만, 화염문의 형상을 한 예는 중국에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고구려와 백제가 정치적으로 단절되었지만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교류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시킨 예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