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초를 꽂아 실내를 밝히는 조명기구의 하나로, 크기와 형태, 문양이 거의 같아 한 쌍으로 제작되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 부분을 따로 주조해 조립해 만든 금속공예품으로 촛대 각 부분을 반구형의 수정으로 볼록하게 감입하였다. 수정은 금속제로 꽃모양을 만든 후 그 중앙에 감입하는 방식인데 자주정과 백수정 두 종류가 사용되었다. 촛대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접시를 굵은 기둥에 연결해 만든 형식이다. 큰 접시 아래에는 곡선으로 도톰하게 말린 6개의 다리가 있고 그 밑에 육화형의 받침대를 다시 부착하였다. 촛농을 바치는 두 점의 접시도 모두 육화형인데 각 중앙에 꽃잎과 함께 수정을 감입해 장식하였다. 수정 주변에는 화려한 화문이 음각으로 가득 새겨져있고 그 주변을 어자문으로 채워 화려하다. 기둥의 측면은 곡선으로 크고 작은 마디를 연결해 제작했는데 기둥 표면에 빽빽한 주름이 있고, 기둥 중앙과 하단에는 공간을 구획해 6개의 수정을 감입해 장식했다. 작은 접시 위에는 이층으로 표현된 연꽃 받침이 놓여있는데 주변을 연꽃잎으로 둘렀고, 받침에는 각 잎마다 모두 12개의 수정이 감입되어 있다. 초를 꽂는 부분은 원통형으로 꽃잎이 바깥으로 말려있고 측면은 6개의 공간으로 구획한 후 다시 수정을 감입해 장식한 모습이다.
촛대는 조명기구의 하나로 삼국시대까지는 그릇 형태의 등잔이 주를 이룬다. 삼국시대 대표적인 예로는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으로 등잔에 기름을 담아 불을 켰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후 초가 생산되면서 촛대가 제작되기 시작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촛대의 대부분이 고려시대 이후로 통일신라의 예는 찾기 어렵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통일신라 촛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활석제 촛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동제 촛대를 들 수 있다. 반면, 경주 월지에서는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가 출토되었고 일본 쇼소인[正倉院]에서도 정교한 기술을 볼 수 있는 가위가 소장되어 있어 통일신라 때의 조명기구 사용을 엿볼 수 있다.
현존하는 통일신라 촛대 중에는 금동 수정 장식 촛대처럼 화려한 예는 거의 찾기 어렵다. 다른 예들에 비해 다양한 기법들이 사용되었기 때문인데, 특히 통일신라 어자문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어자문은 타각정의 하나인 강철제 누깔정 혹은 방울정을 금속 표면에 세우고 이를 망치로 때려서 오목하게 들어간 작은 원문을 의미한다. 배열된 작은 원문이 물고기 알처럼 보인다고 해서 어자문으로 명명된 이 문양은 이집트에서 출발한 외래 기법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전한대(前漢代) 금은제 인장에서 처음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초기의 어자문은 백제에서 확인되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금동제 허리띠 장식에는 7개의 어자문이 군데군데 시문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어자문은 금동 수정 장식 촛대처럼 주문양의 배경을 장식하는 데에 주로 사용해 삼국시대 군데군데 포인트로 이용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현재 한쪽 촛대에는 초록색의 녹이 전면에 두껍게 덮여 있고 다른 촛대는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부에 도금한 금색을 확실히 볼 수 있다. 촛대 전면에는 48개의 크고 작은 수정을 감장해 완성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다수의 수정이 빠져나가 없어진 상태이다.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금속공예품으로 어자문, 감장기법을 이용한 화려한 장식과 함께 세련된 조형감을 엿볼 수 있는 국보급 국가유산이다. 1974년 국보로 지정된 금동수정장식 촛대는 중국에서도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들 뿐만 아니라 8세기 중반 이후 통일신라 금속공예 상황을 보여주는 유물로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