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5쌍의 금귀걸이가 출토되었는데 이 중 왕의 것은 1쌍이고 나머지는 모두 왕비의 것이다. 왕비 귀걸이는 머리 쪽에서 2쌍, 발치 쪽에서 2쌍이 출토되었다. 발치 쪽에서 출토된 것은 원판형의 장식만을 매달은 단순한 형태인 반면,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왕의 것처럼 장식성이 뛰어나 국보로 지정되었다.
두 점 모두 길쭉한 장식이 매달려있는 형태로 한 점은 두 개의 장식이, 또 다른 한 점은 한 개의 장식만이 달려 있어 차이가 있다. 먼저 두 개의 장식이 달린 귀걸이의 형태를 살펴보면, 큰 고리에 작은 고리가 있고 그 아래 장식이 매달려 있는데, 장식의 길이와 함께 끝에 달린 장식이 다르다. 길이가 긴 장식 끝에는 끝이 뾰족한 탄환형의 장식이 금줄 고리에 매달려 있는데, 고리에는 작은 원형의 금판영락이 여덟 부분에 걸쳐 4개씩 금줄로 묶여있어 화려하다. 이보다 짧은 장식 끝에는 2개의 하트모양 심엽형 금판이 중앙을 직각되게 접은 후 서로를 맞닿게 부쳐 위에서 보면 네 개의 날개를 단 십자형으로 입체감이 있다. 이후 금줄로 연결시켜 고정한 후 작은 심엽형의 금판을 매달아 장식하였다. 심엽형 장식은 외형을 따라 새김눈테[刻目帶]를 둘러 장식했고 안쪽에는 작은 금알갱이를 부착했으나 일부 떨어져 나갔다. 이와 같은 심엽형 장식은 금줄로 이어진 고리에 묶여있으며 중간에는 녹색 유리옥이 금제 모자를 쓰고 있는데 모자는 둥근 고리를 연결해 만든 형태이다. 심엽형 영락이 3군데 4개씩 달려있는데 테두리에 새김눈테가 둘러져, 앞서 살핀 탄원형 장식의 영락과는 차이가 있다. 함께 출토된 한 쌍의 귀걸이는 앞서 본 심엽형 장식만 매달아 장식한 것으로 유리옥 중 1개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하나의 고리에 두 줄의 장식이 매달린 형식은 무령왕의 금귀걸이처럼 그 예를 찾기 어려운 편이나, 귀에 걸리는 중심 고리처럼 금판을 둥글게 말아 접합하는 형태로 속이 비어 있게 제작하는 방식은 6세기 전반 신라 보문동 부부총에서 출토된 귀걸이에서도 볼 수 있다. 반면, 앞서 보았던 2개의 심엽형 금판을 반으로 접어 네 날개모양으로 부착해 만드는 장식은 무령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일본 시가현[滋賀縣] 카모이나리야마고분[鴨稻荷山古墳]의 출토품과 유사해 주목되며, 유리 구슬 위로 작은 고리를 연결해 반구형을 덧씌우는 방식은 신라에서도 보이기는 하지만, 신라의 경우 반구형이 아닌 완전한 구형으로 중간을 연결하는 장식으로 활용해 차이가 있다.
백제 귀걸이는 신라, 가야에 비해 출토 사례가 극히 적어 그 특징을 파악하기 어려웠으나 연대가 확실한 무령왕릉 출토품을 통해 6세기 전반 백제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장신구를 파악할 수 있는 기준점을 제공해주고, 신라·가야·왜와의 교류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준점을 마련해주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