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대 국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된 고구려는 대폭 늘어난 인구와 영토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관리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국내성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린 귀족들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실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도(王都)의 건설이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광개토왕 이후 점차 대두되었다. 한편 장수왕의 재위 기간(412∼491) 동안 국제정세는 복잡하였다. 북연(北燕)정권이 들어서면서 서쪽으로부터의 압박에서 다소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서쪽에서 새로 일어난 북위(北魏)는 고구려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한편「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 의하면, 왜가 백제와 연합하여 남방에서 분쟁을 일으켜왔다. 백제, 신라와 더불어 왜가 어우러진 복잡한 상황은 고구려로 하여금 남쪽지역에 대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였다.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에 도읍을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고구려가 천도한 곳은 대동강의 북쪽 연안이었다. 대동강의 남쪽 지역은 고조선시대 이래 선진문화가 발달해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평양지역으로 도읍을 옮긴 천도(遷都)의 구체적인 실상은 분명치 않다. 이때의 왕성이 이전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의 왕성구조를 재현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평상시에는 왕이 평지성(平地城)에서 거주하다가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인근에 축조해놓은 산성(山城)으로 옮겨가 거주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평지성과 산성이 함께 왕성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양성설(兩城說)이 지지를 얻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후 대성산성(大聖山城)과 청암동토성(淸巖洞土城)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王都)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정치 · 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중국의 북위(北魏)는 외교 교섭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국가들 중에 고구려를 또 다른 중국 왕조인 남제(南齊)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세력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고구려는 그로부터 160년 만에 왕성 자리를 인근 지역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기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천도는 남쪽에 인접해 있던 백제,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의 한성함락과 한강유역 장악은 백제의 웅진천도(熊津遷都)로 이어졌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통해 강성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나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