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936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군수리 절터의 목탑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출토되었다. 크기는 13.5㎝이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백제의 고도 부여[사비] 군수리 절터에서 목탑 중앙부 심초석에서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금동보살입상과 함께 출토되었다. 불상에 관한 명문이나 문헌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납석(蠟石) 혹은 활석(滑石)이라는 무른 재질의 돌로 만들어졌다. 불상은 방형(方形) 대좌 위에 선정인(禪定印: 참선하는 모습의 손 자세)을 결한 채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있다. 법의(法衣: 불상의 옷)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 형식으로서 밑자락이 무릎 뿐만 아니라 대좌까지 덮어 흘러내리고 있다. 법의가 대좌 앞부분을 가리고 흘러내린 것은 상현좌(裳懸座)라고 하는데, 이 형식의 대좌는 초기 불상에 많이 확인된다.
불상은 몸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머리와 손,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법의 자락 등에서 초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준다. 가늘게 뜬 눈과 턱을 당겨 앞으로 약간 숙인 얼굴, 곧은 자세의 몸 등에서 선정(禪定)을 수행하는 붓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한편, 정면과 달리 밋밋하게 처리된 뒷면, 어느 곳인가에 고정하기 위하여 깎은 방형(方形) 대좌 밑 부분의 네모난 촉 등을 통하여 원래는 작은 목제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기 위한 집 형태의 공간) 속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나,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상이 취하고 있는 선정인이 석가모니 붓다의 참선(參禪) 수행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석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 불교 전래 초기에 가장 먼저 유행하던 불상 형식이다. 삼국시대 5세기에 조성된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이나 부여 신리(新里)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고구려 장천(長川) 1호분 벽화의 예불도(禮佛圖)에서 같은 형식의 불상이 확인된다. 불상은 군수리의 백제 절터 목탑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백제 불상으로 추정되며, 조성 시기는 6세기 전반일 가능성이 높다.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출현하는 선정인의 수인(手印: 손 자세)을 결하고 있다. 불상은 초기 불상의 특징인 몸에 비해 머리와 손이 큰 편이다. 또한 납석이라는 독특한 재질을 이용하여 불상을 만들었다.
군수리 석조여래좌상은 백제 초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서, 불교 전래 초기의 승려들이 선관(禪觀: 참선) 수행을 위하여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