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삼곶리돌무지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 자리해 있다. 무덤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임진강의 북안에 넓게 펼쳐져 있는 충적 대지상의 모래언덕 위에 조성되어 있다. 주위에서 가장 탁월한 전망을 지닌 곳에 고립되어 있는 입지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1993년 이 돌무지무덤이 체계적으로 정식 발굴된 이래, 동일 형식의 무덤으로 연천학곡리고인돌, 장학리적석무덤, 정선아우라지유적, 광주곤지암적석총 등이 발굴되었고, 지표 조사와 수습 조사 결과 현재 40여 기의 돌무지무덤이 남한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이들 돌무지무덤의 분포 지역을 보면 임진강 중상류, 한강 하류, 북한강 · 남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이러한 분포권은 마한계 무덤으로 인정되는 안성천 · 금강 수계의 도랑움무덤 · 도랑널무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이러한 남한 지역 돌무지무덤의 분포권에 착안하여 기본적인 무덤 형식이 고구려 돌무지무덤을 따르고 있는 점을 들어, 그 축조자의 종족적 기반을 고구려계 맥족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말갈(靺鞨), 즉 예계(濊系) 집단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연천삼곶리돌무지무덤은 백제 지역에서 조사된 돌무지무덤 중 여러널식에서 외널식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양곽식 묘제이다. 무덤의 전체 구조는 동 · 서 두 개의 무덤을 연접시킨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쌍분의 동분과 서분 각각은 구릉 위에 조성된 계단식의 돌더미 부분, 돌더미 부분 북쪽에 딸려 있는 깐돌 시설, 구릉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 설치된 무덤 보호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구릉의 크기는 전장 약 38m, 최대 폭 47m, 높이 7.5m이고, 돌더미 부분의 크기는 동서 긴 축 28m, 남북 짧은 축 11m, 남아 있는 높이 1.4m 정도이다. 묘곽(墓槨)의 크기는 대략 2.6m×1.4m 정도이나 정확하지는 않다.
돌더미 부분은 구릉의 윗부분을 수평으로 깎아 편평하게 한 후, 그 위에 길이 50∼60㎝ 정도의 큰 강돌을 깔아서 무덤 기초 부분을 만든 뒤, 그 위에 2∼3단 정도의 사다리꼴 계단식 돌더미를 마련하였다.
돌더미 부분의 중앙에는 장방형의 무덤방 2개가 ‘목(目)’자 모양으로 돌더미 부분의 긴 축 방향과 일치되게 배치되어 있다. 묘곽의 축조는 막쌓기 수법으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함께 사용하되, 간혹 묘곽의 벽을 따라 돌을 세워 놓기도 하였다.
깐돌 시설은 편평한 강돌을 한두 겹 깔아서 조성하였다. 남한 지역의 다른 돌무지무덤에서 이와 유사한 시설이 발견되지 않아서 정확한 용도를 알기는 어렵다. 다만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비슷한 구조를 참고한 무덤의 부속시설인 점으로 미루어 제례 공간으로 추측할 수 있다. 무덤 보호시설은 구릉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 강돌을 한두 겹 정도 깔아서 마련하였다. 수해로 인해 무덤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다.
출토 유물은 동서 두 개의 묘곽에서 목걸이 2개체분과 쇠화살촉 2점, 토기 조각 및 부서진 사람의 뼛조각이 출토되었다. 깐돌 시설과 무덤 보호시설에서는 둥근 구슬과 토기 4개체분, 숫돌 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발굴 담당자는 이들 유물 형식에 의거하여 대략 3세기 무렵에 조성된 무덤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백제 건국의 주체가 온조 집단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유이민이라고 기록하였다. 또 『삼국유사』에서는 춘천 지역을 옛날의 맥국(貊國)이라 하였고,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해 "고구려의 남동쪽 예(濊)의 서쪽이 옛 맥(貊)의 땅인데 지금 신라의 북쪽 춘천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문헌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발굴 유적이 연천삼곶리적석총을 비롯한 임진강 · 남한강 · 북한강에만 집중 분포하는 돌무지무덤이다. 한편, 이들 돌무지무덤의 축조 집단을 고구려계 맥족(貊族)으로 보고 『삼국사기』 초기 기사를 읽으면,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내용이 허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