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기원전19~기원후18년이다. 아버지 고주몽을 찾아 기원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9년 선비를 쳐서 항복을 받았고 13년 부여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14년에는 양맥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빼앗는 등 재위 기간에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다. 3년에는 도읍을 홀본에서 국내 지역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유리(類利) · 유류(儒留) 또는 누리(累利)라 했고, 『위서(魏書)』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 · 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 동명성왕(東明聖王)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 왕비는 다물후(多勿侯) 송양(松讓)의 딸이다. 아버지 고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년(동명왕 19) 4월에 동부여(東夫餘)에서 고구려로 와서 곧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해 9월 동명성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고구려왕국의 초석을 다졌다.
서기전 17년(유리왕 3)에는 계비인 치희(雉姬)를 그리는 「황조가(黃鳥歌)」를 지었고 한다.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 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國內) 지역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그러나 고구려가 유리왕대에 국내 위나암으로 천도하였다는 삼국사기 기록의 사실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들도 있다.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 군사의 출동을 요구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왕망의 신(新)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夫餘)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豆谷) 이궁(離宮)에서 사망했으며 두곡 동원(東原)에 장사지냈다.
왕자 도절(都切)을 태자로 삼았으나 1년에 사망하고, 4년에 다시 왕자 해명(解明)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가 외국과 분쟁을 일으키자 자결시켰다. 그 뒤 14년 왕자 무휼(無恤)을 태자로 책립, 18년에 유리왕이 사망하자 대무신왕(大武神王)으로 즉위하였다.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 · 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관계에 있는 인물로 여겨 유리왕과 주몽을 부자관계가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이런 근거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姓)은 고씨(高氏)로, 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慕本王)까지는 해씨(解氏), 그리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 이후는 다시 고씨로 되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또한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보기도 한다.
이렇게 혈통이 다른 것을 고구려의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 즉 고구려 초기에는 유리왕계의 소노부 해씨세력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뒤에 태조왕 때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소노부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에는 주몽과 유리왕, 태조왕이 각각 성씨가 달랐으며, 고구려 초기 왕계를 신라처럼 3성 교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후대까지 주몽과 유리왕이 초기 왕계에 편입되어 숭앙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 계루부 내의 각기 다른 씨족집단 출신일 뿐 왕위 교체는 없었다고 보기도 한다.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나타나는 소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실교체는 주몽시대 이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소노부 해씨는 송양왕(松讓王)의 비류국(沸流國)이거나 그 외의 다른 소국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왕계는 대체적으로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1차적으로 연결 · 정리되었다고 보며,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친 왕계 정리 작업에 의해 『삼국사기』의 왕계가 성립된 것으로 본다. 각각의 왕계 정리 작업은 당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대체로 계루부 왕실의 신성화 및 계루부 내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