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유리왕의 태자이다. 본래 태자였던 도절(都切)이 죽자 서기 4년(유리왕 2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 해에 고구려가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할 때 부왕을 따라가지 않고 졸본(卒本)에 남아 있었다. 힘이 세고 용감하였는데, 서기 8년 이웃의 황룡국(黃龍國) 왕이 이를 듣고 힘을 시험하여 보려고 강한 활을 보내자, 고구려를 가볍게 보지 못하도록 활을 쉽게 꺾어 황룡국 왕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유리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유리왕은 황룡국으로 하여금 그를 유인, 살해하게 하였다.
유리왕은 해명의 행동에 화를 내며, 황룡국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유인하여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서기 8년 3월에 황룡국에 초빙되어 갔으나 해명을 만난 황룡국왕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그대로 돌려보냈다.
서기 9년 유리왕이 칼을 내려 자결할 것을 명령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원(礪原)의 동쪽 들로 가서 달리는 말에서 몸을 날려 미리 땅에 꽂아 둔 창에 찔려 죽었다. 조정에서는 태자의 예로 장례하고 이 곳에 묘(廟)를 세우고 창원(槍原)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