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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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권13) / 황조가
삼국사기(권13) / 황조가
고전시가
작품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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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가.
내용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이 지었다는 시가. 원가(原歌)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왕조에 4언 4구의 한역시(漢譯詩)와 창작동기가 전할 뿐이다.

유리왕은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골천(鶻川)사람의 딸 화희(禾姬)와 한인(漢人)의 딸 치희(雉姬)를 계실(繼室)로 얻었다. 두 여자가 사랑을 다투어 서로 화목하지 않자, 왕은 양곡(凉谷)의 동서에 두 궁을 짓고 각기 살게 하였다.

뒤에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서 7일간 돌아오지 않은 사이에 두 여자가 서로 다투게 되었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가(漢家)의 비첩(婢妾)일 뿐인데, 무례함이 어찌 이리 심한가?”라고 꾸짖으니, 치희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 도망쳐 돌아갔다. 왕이 이를 듣고 말을 달려 쫓아 갔으나, 치희는 노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 꾀꼬리가 날아 모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이에 느껴 <황조가>를 지었다고 한다. 내용은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가 정다운데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翩翩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이다.

이 시가는 창작동기를 해석하는 태도에 따라 창작연대, 작자, 내용, 문학사적 위치 등에 차이를 보인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한역가의 내용을 보면, 유리왕이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정시가로 볼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입장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으로 유리왕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작품으로 보기도 한다. 즉 화희·치희의 싸움을 두 종족간의 대립으로 보면, <황조가>는 유리왕이 이 대립을 화해시키려다가 실패하고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서사시가로 취급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편, 유리왕을 신화적 인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결국 신화적 인물이 창작적인 시를 제작할 수 없으므로 이 시가의 작자도 사실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제작연대도 확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결국 <황조가>를 고대 서정적인 가요로 보면서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 전하는 많은 제례의식 중에서 남녀가 배우자를 선정하는 기회에 불린 사랑의 노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유리왕 3년의 사적(史蹟) 기록에 왕비 송씨의 죽음이 없고 그 당시 왕 내지 지배층의 혼인도 권력구조의 편성과 결부되어 동시처제도(同時妻制度)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중시하는 경우, 화희와 치희의 이름글자 ‘禾(벼)’·‘雉(꿩)’가 수렵경제생활 상태에서 농경경제생활 상태로 전이되어가던 과정임을 보인 설화라는 견해를 펴기도 한다.

혹은 한 편의 순수한 고대의 서정가요로서 부족연맹국가시대에 영고(迎鼓)와 같은 계절제의(季節祭儀)나 수신제(隧神祭)와 같은 성적 제의(性的 祭儀) 때 한 부족장에 의하여 창작·가창된 노래가 영웅활동시대의 일반적인 특징에 따라 영웅적 인물인 유리왕이 지은 것으로 오인되어 ≪삼국사기≫에 채록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창작연대에 관해서도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유리왕 3년(서기전 17)으로 보지 않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은 일찍이 나무 밑에 쉬면서(王嘗息樹下)”에서 ‘일찍이’는 유리왕 3년 이전일 것이므로 유리왕 3년 이전에 창작된 시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한국상고문학연구』(김승찬, 제일문화사, 1978)
『한국고전시가론』(정병욱, 신구문화사, 1979)
「황조가논고(黃鳥歌論攷)」(이종출, 『조대문학』 5, 조선대학교, 1964)
「황조가신연구(黃鳥歌新硏究)」(권영철, 『국문학연구』 1, 효성녀자대학,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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