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비 은팔찌는 두 마리의 용을 좁은 공간 안에 연속적으로 표현했는데 용의 몸체가 고부조로 표현되어 있어 입체적일뿐 아니라 생동감이 있다. 용의 머리, 눈, 다리와 갈기, 발톱과 같은 세부는 작은 망치와 끌로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팔찌의 단면은 반원형으로 팔목에 닿는 내면이 평면으로 처리되었는데, 그 평면을 따라 음각으로 팔찌의 제작 연유를 세로로 적은 명문이 있고,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따라 각목대(刻目帶)가 둘러져 있다.
팔찌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경자년이월다리작대부인분이백주주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경자년 2월 다리라는 사람이 대부인용으로 은 230주를 들여 만들었다.’로 이해된다. 경자년은 520년으로 526년 12월 왕비가 사망했다는 기록을 통해 볼 때 6년 전 제작된 팔찌임을 알 수 있다. ‘다리’는 백제 왕실공방의 장인이었거나 장인집단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부인(大夫人)은 무령왕비를 지칭하는 것으로 당시 왕비를 대부인이라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백삼십은 은팔찌에 투여된 은의 양이며 ‘주(主)’ 또는 ‘주이(主耳)’란 무게의 단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용을 조각한 팔찌는 경주시 노서리 215번지에서 출토된 경주 노서동 금팔찌(보물, 1967년 지정)와 출토지 불명의 금동제 팔찌가 전해진다. 두 점 모두 6세기 신라의 것으로 무령왕릉의 팔찌와 시기적으로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의 것은 백제에 비해 용무늬가 간략하고 입체적이지 못하며 팔찌의 단면이 방형으로 주로 안쪽에 촘촘한 원형의 돌기와 함께 용이 표현되어 무령왕비 은팔찌와는 차이가 크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제작 수준이 높을 뿐 아니라 안쪽에 있는 음각의 명문을 통해 팔찌의 제작 연대와 장인, 사용자, 제작 연유를 알 수 있어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