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고유 왕호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이 있다. 매금은 이 가운데 마립간을 달리 부른 말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상으로는 5세기 초인 414년에 작성된 「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신라매금(新羅寐錦)'이 가장 이른 시기의 용례이다. 5세기 중엽의 상황을 전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 충주 고구려비」에서도 '신라매금'이라는 표현과 함께 '동이매금(東夷寐錦)'이 등장하여, 5세기에 고구려에서는 신라의 왕을 '매금'이라고 칭한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 금석문에서는 6세기 전반인 524년에 건립된 「 울진 봉평리 신라비」의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는 사례가 있고, 신라 말에 최치원이 지은 「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서도 '매금'의 용례가 찾아진다.
참고로 『일본서기』 권9 신공섭정전기에도 '신라왕(新羅王) 파사매금(波沙寐錦)'이라는 표현이 있어, 마치 파사이사금을 파사매금으로도 불렀을 것으로 판단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이 사례는 이른바 '신라정벌'이라는 가공의 설화에 들어 있는 것이어서 사료적으로는 가치가 높지 않다.
매금이라는 왕호가 사용된 시점이 현존 자료상으로는 대체로 4세기 말부터 6세기 전반까지로 나타나므로,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신라 고유 왕호 가운데서는 마립간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다만 매금의 '금'이 마립간 이전에 사용된 왕호인 이사금의 끝 글자이기도 하여 종래의 칭호인 이사금에서 일정하게 영향을 받은 명칭으로 볼 수 있다.
매금이라는 용어가 고구려 측에서 작성한 자료에 먼저 나오는 것을 보면, 신라 측의 왕호를 고구려에서 자의적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마립간'과 '이사금'의 합성어로서 '매금'이라는 표현이 창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신라에서는 이미 왕호가 이사금에서 마립간으로 변화한 상황이었으므로, 설사 매금이라는 칭호가 고구려인들에 의해 사용된다고 해도 그것이 곧 마립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신라의 왕을 '매금왕'이라는 형태로 왕호를 표기한 것은 그런 관례를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