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대형(大兄)에 이르렀다. 그에 관한 기사는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서만 전하고 있다. 「모두루묘지명」의 글자 중 판독이 되지 않는 것이 많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의 가문은 건국 초부터 고구려 왕실과 관계가 있으며, 그는 ‘모 성태왕의 시기(某 聖太王之世)’에 반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모용선비(慕容鮮卑) 등 변방지역 족속과 싸워 물리쳤다. 그 공으로 고구려 왕실로부터 관직·토지·예속민 등을 대대로 하사받게 되었다. 그는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손자인 모두루의 묘지에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
한편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에는 염모를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모두루는 정작 ‘노객(奴客)’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이 묘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모두루가 아니라 그의 조부인 염모라는 학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