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

고대사
지명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
이칭
이칭
대가락, 가락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서기 전후
폐지 시기
532년
지역
김해 지역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이다. 김해의 가야 세력을 가리키는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비롯된 조어이고 가야시대에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가락(駕洛)’으로 불리었다. 현재 ‘금관가야’라는 호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특히 고고학계에서는 변한 소국 단계의 '구야국'에서 한층 더 발전한 소국연맹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목차
정의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
형성 및 변천

현재 일반인들이 김해의 가락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 그대로가 사서에서 확인되는 용례는 아니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5가야에 금관(金官)이 들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였고, 「본조사략」에 금관을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는 여기에서 조합되기 시작하던 용어라고 볼 수 있다.

5가야조의 말미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금관'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금관가야는 고려에서 비롯된 조어였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 채록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가락국에 대한 명칭으로 가장 일반화된 것이기는 하나, 가야시대의 명칭은 아니다.

가야시대에 가락국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하였을 명칭은 「 가락국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불렀다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김유신비문」에 전하는 '가락구촌(駕洛九村)'의 '가락'과 같은 것에서 찾아야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가락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문헌사학계보다 고고학계에서 '금관가야'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김해의 가야 정치체의 국명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간 사회를 가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 구야국', 이후를 '금관가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기는 김해 지역의 경우, 3세기 후반대로 보고 있다.

가야의 연맹왕국 단계는 변한의 소국 단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국가권력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가 대형 분묘(김해는 초대형 목곽묘), 순장, 토기 양식의 출현 등이다. 김해 가야 세력이 소국 규모를 벗어나 연맹왕국의 맹주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증거가 초대형 목곽묘인 대성동 29호분의 등장이다.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의 성립은 변한 속의 병렬적 소국 단계인 '구야국'이 아니라 주변 소국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종속적인 지배 단계인 새로운 연맹왕국 단계로의 진입과 관련된다. 김해 가야 세력의 전성기에는 지금의 부산 및 창원 등의 동부지역을 통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에서 김해 세력을 중심으로 일정한 동질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의 성장 배경은 철 생산과 교역의 거점 역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3세기 후엽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도 확인되듯이 김해의 위치가 중국의 사신이 왜국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 거점이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의 왕성은 김해 봉황토성으로 추정되고 , 금관가야의 왕묘역은 대성동 고분군이다. 대성동 고분군의 묘제 변천은 기원전후서기 2세기 대의 목관묘, 서기 2세기 후반5세기 초의 목곽묘, 5세기~6세기 초의 수혈식 석곽묘의 순으로 전개된다.

금관가야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5만 군대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 남정(南征)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세기 이후에 아라가야대가야에서는 고총고분군이 축조되었으나 대성동고분군에서는 그러한 양상이 미약하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는 고구려 남정 사건 이후에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532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고학계에서는 금관가야 외에 아라가야, 소가야, 대가야라는 명칭도 맹주 세력과 소속국으로 이루어진 연맹왕국을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하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에서 각기 일정한 동질성이 보인다. 이렇듯, 고고학계에서 가야의 사회 발전 단계를 논할때 '□□가야'라는 명칭은 변한 소국에서 벗어난 연맹왕국 단계를 논할 때 유용하게 사용된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단행본

이영식, 『가야제국사연구』 (생각과 종이, 2016)
남재우, 『가야, 그리고 사람들』(선인, 2011)
김태식, 『가야연맹사』(일조각, 1993)
천관우, 『가야사연구』(일조각, 1991)

논문

심재용, 「금관가야 고분 연구」(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이동희, 「고고자료로 본 변한과 가야의 구분: 금관가야를 중심으로」(『한국고고학보』 112, 한국고고학회, 2019)
남재우, 「가야각국의 발전과정과 멸망」(『가야사총론-가야고분군 연구총서 1권』, 가야고분군세계유산등재추진단, 2018)
이영식, 「문헌으로 본 가락국사」 (『가야각국사의 재구성』, 혜안, 2000)
신경철, 「김해 예안리 160호분에 대하여: 고분 발생과 관련하여」(『가야고고학논총』 1,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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