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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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
이칭
이칭
수묘호(守墓戶), 수릉인(守陵人)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수묘인은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이다. 수묘호(守墓戶)이나 수릉인(守陵人)이라고도 한다. 죽은 뒤에도 죽기 전과 같은 생활을 한다고 믿는 계세사상(繼世思想)과 조상의 영혼이 후손들을 돌보아 준다는 조상숭배사상의 영향으로 왕이나 귀족들은 무덤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수묘인 연호(烟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신라와 백제에서도 수묘인 제도가 시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목차
정의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 왕이나 귀족의 능묘를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동원되었던 연호(烟戶).
내용

고구려 신대왕(新大王) 15년(179)에 국상(國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죽자 수묘(守墓) 20가(家)를 두었다고 한다.

또한,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 戶)의 편성과 수묘제(守墓制)의 정비 등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7년(485)에 왕이 시조묘(始祖廟)에 제사하고 수묘 20가를 더 두었다고 전하며, 김유신(金庾信)이 죽은 후 수묘할 민호를 정했다고 한다.

문무왕(文武王) 4년(664) 왕이 제왕릉원(諸王陵園)에 사민(徙民)하도록 했다던 민호는 곧 수묘호(守墓戶)를 가리킨다. 그리고 미추왕릉(味鄒王陵)의 수릉인(守陵人)은 수묘호에 속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의 예를 통해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통일신라에서 수묘인 제도가 시행되었고, 수묘인이 수묘호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록에는 전하지 않지만 백제 등 고대의 다른 나라에도 수묘인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인들은 죽은 뒤에도 죽기 전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한다고 믿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갖고 있었다. 무덤은 저 세상에서 죽은 자가 생활하는 주택으로 여겼다. 따라서 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의 무덤이 잘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은 조상의 영혼이 자신들을 돌보아 준다는 조상숭배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도 조상의 능묘가 오래도록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수묘인이 설치된 것은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수묘인 연호는 복속민으로부터 차출되었다. 그들 간에는 국연(國烟)간연(看烟)의 구별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신라나 다른 나라의 경우도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의 경우 수묘할 능 근처의 백성들을 수묘호로 충원하는데, 수묘호로 충원된 연호는 요역(徭役)을 면제해주고 3년에 한번 교체하며, 제릉사(諸陵司)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이들을 관리했다고 한다. 수묘인의 주요 임무는 능의 청소와 간단한 경비, 그리고 무너진 곳의 보수 등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예를 통해 볼 때 고구려 역시 수묘인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중앙의 관서가 있었을 것이며 임무도 일본의 경우와 같은 것이었다고 추측된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따르면, 구민(舊民)의 경우 국연 10, 간연 100을 차출하고 있으며, 신래한예(新來韓穢)의 경우 36곳에서 국연 20, 간연 200이 차출되어 총 330가가 수묘역에 투입되었다. 구민 수묘호 110가가 징발된 이유는 신래한예 수묘호가 수묘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국연과 간연은 차출 수에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국연이 수묘역 수행의 주가 되고, 간연이 보조의 기능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국연-간연체제는 당시 보편적인 대민편제 방식의 한 유형으로 이해된다. 또한 고구려의 수묘인 연호 편제방식은 당시의 대민편제 방식의 한 유형으로, 고구려 중앙권력의 지방 지배 형태를 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변천

고려시대에는 위숙군(圍宿軍)에 수릉을 담당하는 산직장상(散職將相)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로써 위숙군의 임무 중의 하나가 수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능을 지키는 수릉군과 왕비 부모의 묘를 지키는 수묘군(守墓軍)이 있었다. 수묘인은 이들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지만 수묘인이 후대와 같이 군인이었을까 하는 점은 의문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경국대전(經國大典)』
「고구려 수묘인(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입역방식(入役方式)」(김락기, 『한국고대사연구』41, 2006)
「광개토왕릉비문의 국연(國烟)과 간연(看烟)의 성격(性格)에 대한 재검토(再檢討)」(이도학, 『한국고대사연구』28, 2002)
「광개토왕비의 국연(國烟)과 간연(看烟)-4·5세기 고구려 대민편제의 일례-」(임기환, 『역사와 현실』13, 1994)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 나타난 수묘제연구(守墓制硏究)」(조법종, 『한국고대사연구』8, 1992)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고구려(高句麗)의 수묘제(守墓制)」(조인성, 『한국사시민강좌』3,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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