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우총은 적석목곽분으로 파괴된 상태의 고분이었는데, 노서동 213번지에 위치하고 있어 노서동 140호분이라 불리다가 1964년에 은령총과 함께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로 인해 호우총으로 명명되었다. 무덤은 인근에 사는 주민이 농작물을 심기 위해 땅을 파다가 순금으로 된 신라의 귀고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1946년 5월에 발굴되었다. 발굴된 청동 호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2015년 9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는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합 형태의 그릇이다.
호우 명문은 그릇의 밑면에 4행 4자씩 총 16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이라고 새겨져 있다. 글씨는 주조 당시부터 외형틀에 음각으로 새겨 넣음으로써 두터운 양각명으로 돌출된 것이다. 호우는 고구려 장수왕 3년 을묘년인 415년에 만든 것으로 광개토왕비의 서체와 유사하다. ‘十’의 의미는 열 개를 주조하였음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불교사상에 의한 원만, 무진함을 나타낸다고 보는 설, 什器의 什의 약체로 보는 설, 일종의 종지부(終止符) 혹은 길상(吉相)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명문 상단에 보이는 ‘#’의 표시는 어떤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 그 상징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이 명문을 통해 고구려의 그릇이 교류를 통해 신라의 고분에까지 묻힌 사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어 당시 신라와 고구려의 대외 교류나 정치적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광개토왕의 시호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임은 광개토왕비에서 확인되므로 호우에서의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역시 바로 광개토왕이다. 광개토왕을 장사지낸 일년 뒤에 왕릉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호우를 제조한 것을 신라의 사절이 고구려의 제사의식에 참여하여 호우를 받아서 가져왔던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혹은 호우가 만들어질 때 마침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 나물왕의 왕자 복호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호우총은 다른 유물, 특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 415년보다는 한참 뒤인 6세기 초에 축조된 고분이라는 것이 최근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므로, 청동 호우는 100년이 지난 뒤에 신라 왕족의 무덤에 부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청동호우는 수량이 많지 않은 고구려 금속공예품이라는 점과 명문을 지닌 삼국시대 고분의 편년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더욱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