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동대자유적은 1913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이 지표조사를 통해 초석 10여개를 비롯하여 와당편과 평기와편 등을 확인하면서 알려졌다. 이후 1936년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이 지표조사를 했을 때에는 이미 도로 개설로 인해 유적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고 초석도 원위치에 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초석, 치미, 기와편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에 대한 전면 발굴조사는 1958년 길림성박물관이 3차에 걸쳐 실시하였다.
집안 동대자유적은 국내성에서 동쪽으로 500m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철로가 유적지를 통과하여 유적지는 멸실되고 많은 민가가 자리하고 있다. 주변보다 약간 높은 대지에 조성된 유적으로 동서 약 500m, 남북 약 150m이다.
집안 동대자유적은 둘레에 회랑을 돌린 건축으로 정옥(正屋Ⅰ실, Ⅱ실)과 편방(偏房 Ⅲ실, Ⅳ실)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옥 두 칸의 중간에는 남북으로 길고 좁은 통로가 있고, 복도가 나 있다. 정옥의 면적은 동서 35m, 남북 36m이며, 편방은 정옥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속관계가 있으며 정옥의 회랑과 편방의 복도는 서로 이어져 통한다. 정옥Ⅰ실인 동실은 동서 15m, 남북 11m, 평면은 장방형이며, 실내 중앙에는 둥근 방주형의 석좌가 있고, 동벽 남쪽에서 아궁이터와 그 밖에 재구덩이, 연도, 굴뚝 등도 확인되었다. 정옥 Ⅱ실인 서실은 동서 15m, 남북 14m, 평면은 방형에 가깝다. 여기에서도 초석, 회랑, 구들, 아궁이, 연도, 굴뚝 등도 확인되었다. 편방 Ⅲ실은 정옥 Ⅱ실의 북쪽 6m되는 곳에 위치하는데, 평면은 대략 방형으로 남북 2실로 나누어져 있다. 편방 Ⅳ실은 정옥Ⅰ실의 동남 모퉁이 부근에 위치한다.
집안 동대자유적에서는 청동기, 무기와 농기구를 비롯한 솥 등의 철기, 갑옷편, 각종 고구려 토기와 토기편, 인동문과 연화문 그리고 귀면문 등 와당을 포함한 각종 기와, 벽돌, 방형과 장방형 혹은 부정형의 가공이 별로 되어있지 않은 초석과 섬세하게 가공한 초석이 확인되었다.
실내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단히 적고 건축물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볼 때 제사나 의례에 사용된 건축물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9년(392년)조에 기록된 종묘와 사직과 관련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격식을 갖춘 관청 혹은 침실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고, 연화문와당 등 출토유물의 속성상 고구려 후기의 특징을 많이 보여주고 있어 고구려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