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녹읍 ()

고대사
제도
남북국시대 국학의 학생들을 위해 지급하였던 녹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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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남북국시대 국학의 학생들을 위해 지급하였던 녹읍.
내용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 원년 청주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소성왕 원년(799년)은 원성왕 4년(788년) 독서삼품과가 설치된 해로부터 10여년 후이므로 학생녹읍은 독서삼품과의 제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일종의 관리 등용 제도가 마련되고서 국학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근거를 더욱 확실하게 마련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또한 새로운 관료 집단을 통해 지지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원성왕·소성왕대의 정치적 목적이 독서삼품과와 학생녹읍을 통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녹읍은 관료에 대한 복무의 대가로 일정 지역에 대한 지배를 허용한 제도이다. 신라의 학생들을 위한 녹읍이 존재하였다면 신라의 학생들을 모두 관직을 가지고 있는 관료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들은 준관료에 해당하는 존재로 실제로 관료로는 볼 수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특정한 관등만을 가졌을 뿐 관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신라의 학생녹읍은 녹봉의 형식으로 지급된 일반적인 녹읍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학생녹읍의 대상지였던 청주 거로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도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은 국학의 학생들을 위한 공동의 녹읍으로 파악된다. 예비 관료인 학생들에게도 녹읍을 지급한 것인지 아니면 이곳의 녹읍을 학생을 양성하는 국학에 지급하여 학생 양성의 경비에 충당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국학 학생들에게 녹읍을 지급하였다기보다는 국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경비 내지는 장학기금으로 충당하기 위한 국가의 정책적 배려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즉 학생녹읍은 녹봉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토지가 아니라 일종의 장학제도와 같은 것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학생녹읍이 내성 소속의 소내학생들에게까지 지급되진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신라가 국립대학인 국학의 학생들을 위해 녹읍을 설정하였다는 것은 인재 교육과 관료 양성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신라의 국학과 학생녹읍」(정호섭, 『사총』 58, 2004)
「신라 녹읍제의 성격과 그 변동에 관한 연구」(전덕재, 『역사연구』 1, 1992)
「신라의 녹읍에 대하여」(강진철,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69)
「신라귀족세력의 기반」(김철준, 『인문과학』 7,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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