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난고(益齋亂藁)』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칠언 절구 11수로 이루어졌다.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를 한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11수 가운데에 현재까지 국문 사설이 전해지는 작품은 3편이 있다. 여섯 번째 시 「처용가(處容歌)」, 여덟 번째 시 「정석가(鄭石歌)」 혹은 「서경별곡(西京別曲)」, 아홉 번째 시 「정과정곡(鄭瓜亭曲)」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설은 전하지 않으나 제목과 내용이 『고려사(高麗史)』 「악지」에 전하는 것이 5편이다. 첫 번째 시 「장암(長巖)」, 두 번째 시 「거사련(居士戀)」, 세 번째 시 「제위보(濟危寶)」, 네 번째 시 「사리화(沙里花)」, 일곱 번째 시 「오관산(五冠山)」이 여기에 해당된다.
다섯 번째 시는 출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옷을 벗어 어깨에 둘러메고 꽃밭에서 나비를 좇던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는 내용이나, “이 고을 사람들은 남녀가 봄을 만나 놀기 좋은 시절을 서로 즐기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라는 설명에서 「양주(楊州)」와 일정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열 번째와 열한 번째 시는 제주도 민요를 옮긴 것이라고 밝혀 놓았다. 열 번째 시는 젊은 여자가 재산 많은 사주(寺主)에게 시집가고, 사주는 황모(黃帽)를 쓴 신랑이 되어 신부를 상방으로 맞아들인다는 내용이다. 열한 번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주도 주민들이 종래 물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전라도 쪽에서 장수들이 옹기와 백미를 팔러 오면 크게 도움이 되었는데, 그마저도 자주 올 수 없었으므로 북풍이 불어 보내는 이 배를 항상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몽고의 목장이 설치된 뒤로 관사(官私)의 우마가 전야를 덮어 현지 백성들은 경작할 땅조차 없게 되었고, 드나드는 관리들은 북새를 이루어 더욱 백성들을 못 살게 하여 그 동안 여러 차례 변고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한시도 표현이나 정서에 있어서는 우리 문학다운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자각에서 이런 작품이 출현하였다. 그 결과 속악 가사를 다른 측면에서 재검토하고, 속악 가사로 전하지 않는 우리말 노래까지 어느 정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악부」는 칠언 절구의 짧은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말 노래의 개요를 옮겨 놓거나 어느 한 대목만 번역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곧 우리말 노래의 묘미를 살리는 데에 충실할 수 없다는 한계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