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변주(卞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찬성사 변원(卞元)이고, 아버지는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변옥란(卞玉鸞)이다.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네 살에 고시의 대구(對句)를 외우고 여섯 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는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85년 문과에 급제, 전교주부(典校注簿)·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 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령중랑장(千牛衛中領中郎將) 겸 전의감승(典醫監丞)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태종 초에는 성균관학정(成均館學正),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문과 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 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이 되었다.
이 때 가뭄이 심해 상왕이 크게 근심하자,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였다. 이에 태종이 변계량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렸다.
그 뒤 태종 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419년에는 대부분의 관료들이 반대한 왜구 토벌을 강력히 주장, 이종무(李從茂)를 앞세운 기해동정(己亥東征)을 성공케 하는 데 공헌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 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과거 시관으로 지극히 공정을 기해 고려 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화산별곡(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 『춘정집(春亭集)』 3권 5책이 전한다.
『태조실록(太祖實錄)』·『국조보감(國朝寶鑑)』의 편찬과 『고려사(高麗史)』 개수(改修)에 참여했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樂天亭記)」·「헌릉지문(獻陵誌文)」을 찬하였다.
그 외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만한 것을 모아 쓴 『정부상규설(政府相規說)』이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