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답은 조선 시대에 신하가 올린 상소(上疏)·차자(箚子) 등에 대해 국왕이 내린 답서이다. 상소는 작성 주체와 특정 주제에 한정하지 않았으며, 차자의 경우 주체는 한정되었으나 주제에는 제한이 없었다. 별도의 문서를 작성하여 내리는 형식과 상소·차자의 여백에 계자(啓字) 도장을 찍고 적는 형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답은 상소·차자가 실린 문집이나 실록, 기록류에 등재된 형태로 남아 있거나 일부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것이 현전하고 있다. 조선 시대 국왕이 일반 사족부터 고위 관원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비답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 관원과 일반 백성, 중앙과 지방의 아문이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한 하답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왕에게 올린 문서에 대해 국왕이 직접 처결하는 형식의 하답은 비답과 판부로 구분하여 작성되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 ‘비(批)’와 ‘판(判)’을 별도의 권차에 싣고 있고, 19세기 조선 국왕의 정령(政令)을 형식에 따라 편찬한 『윤발휘초(綸綍彙鈔)』에서 비답류과 판부류를 별도의 항목으로 배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개념상으로도 양자는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답을 통해 국왕이 답변을 내리는 문서는 대표적으로 상소와 차자가 있었다. 상소는 일반 사족에서부터 중외의 고위 관료에 이르기까지 특정 주제에 한정하지 않고 국왕에게 요청 · 건의할 사항을 적어 올리는 문서이며, 차자 역시 작성 주체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담는 사안에 특별한 제한이 없었던 것은 상소와 마찬가지였다.
이에 비해 판부는 직계 아문(直啓衙門)이 담당 업무에 한정하여 국왕에게 보고 · 건의하기 위해 올리는 계본(啓本), 계목(啓目), 장계(狀啓) 등 소위 계(啓) 또는 계문(啓文)에 대한 처결문이다. 즉 비답은 작성 주체나 담당 업무에 구애되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은 상소나 차자에 대한 국왕의 하답으로, 판부는 소관 업무에 대한 보고에 대한 하답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윤발휘초』의 비답류에는 초기, 계사에 대한 하답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계사 등의 문서에 대한 하답은 종종 판부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 부분에서는 조선 후기 당시에도 용어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 연대기 사료에 남은 기록을 보면, 비답의 작성 방식은 별도의 문서를 작성하여 내리는 형식과 상소 · 차자의 여백에 계자(啓字) 도장을 찍고 적는 형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형식으로 작성된 비답은 원문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조선 후기에 상소 · 차자의 원문서는 상달 주체에게 반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대부분 상소 · 차자가 실린 문집이나 국가에서 편찬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기록류에 함께 등재된 형태로 남아 있다.
전자의 형식으로 작성된 비답은 소위 ‘불윤 비답(不允批答)’ 등의 교서(敎書) 형식의 비답으로, 고위 관직을 지낸 조상이 있는 문중에서 보관해 오던 것이 여러 점 현전하고 있다.
비답은 조선시대 국왕이 일반 사족에서부터 고위 관원에 이르기까지 정치 · 사회적 사안에 대해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일상적인 행정 업무에 대해 정형화된 형식의 하답인 판부에 비해, 정치적으로 중요한 결정은 신하가 올린 상소 · 차자에 대한 비답의 형식으로 내려지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