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지 ()

유성룡 종손가 유물 중 영의정 교지
유성룡 종손가 유물 중 영의정 교지
법제·행정
제도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 및 의중을 담은 언사, 또는 국왕이 관직 등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敎旨)’라고 표기하는 문서군을 지칭하는 용어.
이칭
이칭
관교(官敎), 홍패(紅牌), 백패(白牌)
내용 요약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 및 의중을 담은 언사, 또는 국왕이 관직 등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표기하는 문서군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식으로 ‘왕지’라고 표기하다가 1435년(세종 17)에 교지로 바꾸었다. ‘교’는 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을, ‘지’는 국왕의 의중을 가리키므로 교지란 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씀을 의미한다. 교지에는 관직임명문서인 고신, 과거합격증서인 홍패·백패, 추증·시호·면역·사패 교지 등이 있다. ‘교지’ 다음에 사여하는 내용을 적은 후 ‘~자’로 마감하고 발급 일자를 적고 어보를 찍었다.

정의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 및 의중을 담은 언사, 또는 국왕이 관직 등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敎旨)’라고 표기하는 문서군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조선시대 국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1435년(세종 17)에 교지를 사용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교지라고 지칭된 문서는 관직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 · 백패(白牌), 추증(追贈) 교지, 시호(諡號) 교지, 면역(免役) 교지, 사패(賜牌) 교지 등이 있다.

연원 및 변천

교지라고 부르는 문서는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왕지’라고 표기되었다. 『세종실록』 17년 9월 3일 기사에 “속전(續典)에는 판(判)을 고쳐 교(敎)라 하고, 왕지를 고쳐 교지라 하였는데도, 관교(官敎) 주1과 외리(外吏)의 정조(正朝) · 안일(安逸) 주2에는 그대로 왕지라 일컫게 되니, 실로 불편합니다. 청컨대, 모두 교지로써 고치소서.”라는 이조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는 우선 당시까지 국왕의 명령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던 왕지는 1435년 9월 시점에 법전에 반영하여 교지로 개정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울러 문서 형식상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가 이 시점까지는 왕지라고 적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문서를 보면, 1435년 6월 29일 정자신(鄭自新)에게 발급된 고신이 왕지라고 표기한 문서의 하한선이고, 교지라고 표기한 문서는 1436년(세종 18) 6월 3일 이정(李禎)에게 발급된 고신이 상한선이다.

내용

조선은 국초부터 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을 ‘교(敎)’라고 칭하였다. ‘지(旨)’는 여기에 담긴 국왕의 의중을 가리킨다. 따라서 교지란 국왕의 명령이 담긴 말씀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교’를 발할 수 있는 자는 형식상 국왕 한 사람뿐이었지만, 실제로는 세자 · 중전 · 대비 등의 말씀을 교지로 명명한 기록도 종종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지위에 따라 사용하는 글자에는 엄밀한 구분이 있었다. 즉 중전이나 대비의 말씀은 ‘ 내지(內旨)’, 세자의 말씀은 ‘ 영지(令旨)’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1443년(세종 25)에 국왕이 “지금부터 모든 전교(傳敎)하는 일은 모두 교지로 칭하라.”라고 명령한 바가 있다(『세종실록』 25년 8월 29일). 이 기사를 통해 교지가 국왕의 명령인 ‘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지는 국왕의 명령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하였지만, 특정 종류의 문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 등을 사여하는 문서는 첫 행에 교지 두 글자를 적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러한 기능을 하는 같은 양식의 문서를 교지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흔히 교지라고 칭하였던 문서에 대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해 놓았다. 먼저 관직 임명 문서인 4품 이상 고신(告身)이 있었고, 과거 합격 증서는 홍패와 백패가 있었다. 또한 죽은 관원이나 그 자격에 준하는 자에 해당하는 자에게 내리는 추증 교지, 시호를 내리는 시호 교지, 조선 초기 향리에게 면역을 해주며 작성한 면역 교지, 공신 등에게 노비와 토지 등을 사여하면서 내린 사패 교지 등이 있다. 이상의 문서들은 조선시대로부터 현재까지 교지로 명명되고 있다.

문서의 형식은 첫 행에 ‘교지’라고 적고, 본서 본문은 수취자의 이름과 국왕이 사여하는 관직, 물품, 특권의 내역을 적은 후 ‘~자(者)’로 마감하였다. 그리고 발급 연월일을 적었다. 이는 교지라고 불리는 문서군의 공통된 형식이다. 그러나 발급 연대 위에 찍은 어보(御寶)의 종류에는 차이가 있었다. 즉 관직을 임명하는 고신에는 주3를 찍고, 문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홍패와 생원 · 진사시 합격 증서인 백패에는 주4를 찍었다. 그 외 추증 · 시호 · 면역 · 사패 등의 교지에는 임명장과 같은 시명지보를 찍었다.

의의와 평가

교지의 수혜 범위, 교지의 작성 및 전달 방식은 조선시대 왕권의 범위와 영향력,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발현 양상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고려말 조선초 왕명 문서 연구』(박성호, 한국학술정보, 2017)
「조선시대 임명 문서 연구」(유지영,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주석
주1

작위를 봉(封)하는 사령장(辭令狀).    우리말샘

주2

구실아치 따위를 임명하던 사령장.    우리말샘

주3

시명을 내리는 교명, 교서, 교지 따위에 찍는 임금의 금도장.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과거의 권자와 홍패ㆍ백패에 찍던 임금의 도장.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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