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5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현재 1623년(인조 1) 3월부터 1910년(융희 4) 8월까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본래 『승정원일기』는 1623년부터 1894년(고종 31)까지 3,047책이었다. 그런데 갑오경장 이후 여러 차례의 직제 개편으로 이름은 달라졌지만, 승정원의 기능을 이어받은 관서의 일기까지 합하면 모두 3,245책이 된다. 그들 일기의 명칭과 책 수를 보면 아래 [표]와 같다.
명칭 | 책수 | 기간 |
---|---|---|
승정원일기 | 3,047 | 1623. 3.∼1894. 6. |
승선원일기 | 4 | 1894. 7.∼1894.10. |
궁내부일기 | 5 | 1894.11.∼1895. 3. |
비서감일기 | 8 | 1895. 4.∼1895.10. |
비서원일기 | 115 | 1895.11.∼1905. 2. |
비서감일기 | 33 | 1905. 3.∼1907.10. |
규장각일기 | 33 | 1907.11.∼1910. 8. |
〈표〉 『승정원일기』의 명칭과 책수 |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 이하 정3품의 승지 6인과 정7품의 주서(注書) 2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일기』의 기술은 주서의 소임이었다.
승정원에는 가관(假官) · 분관(分官)으로서 가승지 · 분승지 ·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 가주서 · 분주서가 있었다. 그런데 다른 가관 · 분관은 임시직이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전쟁에 관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사변가주서만은 상설화되어 군무와 칙사(勅使) · 국안(鞫案: 죄인을 신문한 기록) 등에 관한 기록을 맡게 되었다.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한 달 분씩 정리해 국왕에게 올려서 재가를 받았다.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일기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되었다. 한 달 분을 대개 한 책으로 엮었으며, 분량이 많을 경우에는 두 책으로 나누었다. 윤달의 일기는 물론 따로 성책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승정원일기』가 있었고, 이미 고려시대에도 기구(機構)는 다르나, 승정원과 같은 기능을 가진 부서가 있어 일기도 기록되었다. 즉 고려 성종대(981∼997)에는 은대남북원(銀臺南北院)을 두었고, 현종대(1009∼1031)에는 중추원에 정3품의 승선(承宣) 4인과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인을 두어 왕명을 출납하였으며, 그 출납한 공사(公事)를 기록하게 하였다. 뒤에 부서와 관명에 변천이 있었으나, 그 기능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은 건국 직후 중추원에 5인의 승지와 2인의 당후관을 두어서 왕명의 출납과 기록을 맡게 했으며, 1400년(정종 2)에 승정원은 독립된 기구가 되었다. 다음 해에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와 승정원을 합해 '승추부(承樞府)'라고 하고, 도승지 이하를 지신사(知申事) · 대언(代言)이라고 하였다. 1405년(태종 5)에 대언 1인을 증원했으며, 이해에 이들을 승지로 개칭하였다.
승정원이 다시 독립된 기구가 되고 당후관을 주서로 개칭한 시기에 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같은 해인 1405년(태종 5)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 보관되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의 전화로 불타고 말았다. 또 임진왜란 이후 1623년(인조 1)까지의 일기도 이괄(李适)의 난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인조 때에 1592년(선조 25) 이후의 일기를 보수했으나, 또다시 1744년(영조 20) 승정원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승정원일기』에도 후일에 보수한 것이 많다. 즉 1744년(영조 20)의 화재로 1592년에서 1721년(경종 1)까지의 일기가 소실되고, 1722년(경종 2)에서 1744년(영조 20)까지의 일기가 남았다.
영조는 1746년(영조 22)에 일기청을 설치하고 『승정원일기』의 보수에 진력하였다. 보수를 위해 조보(朝報)를 비롯해 각 사(司)의 일기 · 등록 등 기본 사료와 관인의 일기 · 문집 등을 널리 이용해 만전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1747년(영조 23) 말에 548책의 개수를 끝냈는데, 이것은 본래 소실된 책수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그 뒤 1888년(고종 25)에 또다시 승정원의 화재로 1851년(철종 2)에서 1888년(고종 25)까지의 일기 361책이 소실되었으나, 1890년에 개수를 끝냈다. 이 두 차례의 화재 이외에도 몇 차례에 걸쳐서 약간의 분실, 또는 소실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승정원일기』에는 보수한 부분이 상당히 많으나, 최선을 다한 보수였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매우 높다. 특히 승정원은 전통적 왕조 정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으며, 그것은 『승정원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왕명의 출납’이라는 임무만으로도 승정원의 중요성을 알 수 있지만, 승정원의 기능은 보다 폭넓었다. 『육전조례(六典條例)』 · 『은대조례(銀臺條例)』 · 『은대편고(銀臺便考)』 등을 통해 기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왕명의 출납, 즉 왕명을 밑으로 전달하고 하의(下意: 밑에서의 의견)를 위로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승정원은 정3품의 관서이기는 하나 그보다 품격이 높은 관서, 즉 의정부 · 비변사 · 육조 · 대간 · 홍문관 등에 대한 왕명의 출납도 승정원을 통했으며, 고관 중신의 입대에도 승사(承史)가 배석하였다. 또 중요한 공사(公事)의 기록인 일기 및 조보(朝報)의 기술과 궁궐문의 개폐도 담당하였다.
② 경연(經筵) · 입시(入侍)에 참석하고 추국(推鞫: 죄인의 신문)에 관여하였다. ③ 관리의 임면과 상벌 및 과시(科試), 그리고 병무(兵務)에까지 관여하였다. ④ 의례적인 일, 즉 국가와 궁중의 제향(祭享), 국왕의 동가(動駕: 어가를 타고 거둥함)와 대외적 사대 · 교린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승정원은 국가의 광범한 공사와 의례적인 일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승정원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이 일기가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이다.
한편, 『승정원일기』의 원본은 초서(草書)로서 해독하기 어려운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1961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해서(楷書)로 고쳐 쓰고 구두점을 찍어서 출판해 이용하기에 편하게 되었다. 규장각 도서 등에 있다.
조선 후기의 기본 사료로서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 『일성록』이 있으나, 『승정원일기』는 국정 일반에 관해 광범한 기록을 했다는 점과 또 매일의 기록으로서 일차적 사료라는 점에서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