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업총합소 ()

의약학
단체
1908년 한약취급업자가 조직한 비영리단체.
정의
1908년 한약취급업자가 조직한 비영리단체.
개설

1908년 7월 한약을 취급하는 전약업자를 규합해서 동업자간에 친목과 단합을 통하여 사회적·도덕적 기능을 다하자는 데 목적을 두고 조직하였다. 그 뒤 이 약업총합소가 모체가 되어 현대약학강습소를 시작함으로써 현대 약학교육의 싹이 텄다.

설립배경

이 당시 약업이라고 하면 한약업을 지칭하는 것이고, 한약업이라 해도 한방의생·건재약국·당재무역(唐材貿易)·매약·제조까지 다양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조직체로 묶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서울 구리개(지금의 서울 을지로)의 거상(巨商)들의 발언권이 커서 이들 약업자들을 총합시킬 수가 있었다. 이 모임을 통해서 그들은 계(契)도 하고, 약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약업의 장래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한약재는 다품종이어서 언제나 수요와 공급의 차질이 심하고 매점매석으로 재고량 여하에 따라서는 시세의 등락이 너무 심해서, 서로간에 정보교환이 필요하였다. 양의약의 도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아직도 미약하고 부분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약재의 대세는 한의약이 쥐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제주도 남단에서 함경북도 끝까지 13도 전역이 약업시장이었기 때문에 한약재의 소비가 대단하였다. 가히 한약업의 전성기라 할만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서울의 거상들은 거의 구리개에 모여 있었는데, 지금의 을지로2가에서 3가 사이의 큰 길을 두고, 남과 북 양쪽 사이에 큼직한 한약국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대로 가전(家傳)으로 업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계급은 중인에 속하였다. 이 약업총합소는 약업관계로는 최초의 단체이며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서울시한약협회’이다.

그 변천을 보면, 한일합병 뒤인 1912년에는 ‘한성약업총합소’라고 명칭을 고쳤다가 곧 ‘조선약업총합소’라고 고쳤으며, 1923년에 ‘조선한약조합’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뒤 ‘경성한약업조합’을 거쳐 ‘서울시한약업조합’이 되었다가 오늘에 이르렀는데, 그 명칭변경만 보아도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다.

이 약업총합소의 첫사업으로는 약업정보지로 『월보(月報)』를 발간하였는데, 이 일을 오랫동안 맡아 한 사람은 생약의 권위자인 신길구(申佶求)였다. 약업총합소의 초대 대표는 최한표(崔漢杓)였으며, 1912년에 2대 대표를 이석모(李碩謨)가 맡은 이후 총합소는 활기를 띠어 회원들의 단결이 잘되었다. 서울 장교동(長橋洞)에 사무실용으로 집을 마련한 것도 즉석에서 여러 사람이 찬성하고 거금을 내놓아, 하루 사이에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약업이 잘된다 하더라도 양약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들이 잘 알고 있었다. 약업총합소 회원들은 계를 하여 이를 장진계(長進契)라 하였고, 계의 장은 구리개에서 한약업을 하고 있는 최헌규(崔獻圭:崔南善의 아버지)가 맡아 하였다. 이 계는 한 달에 한번 또는 두번도 열렸는데, 서로 다투기 쉬운 업자들간의 친목이 이 계로 말미암아 잘되어 나갔다.

1914년 6월에 총합소의 주최로 우선 약품취급하기강습회가 개최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양약지식의 보급을 위한 강습회였다. 약학에 관한 간단한 초보적인 것으로 3개월간의 단기속성이었으나, 수료생은 40명이나 되어 첫번째치고는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힘을 얻어 이제 좀더 본격적인 약학교육기관을 만들기로 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자금과 비용은 장진계의 자금에서 부담하기로 하고, 1915년 4월 ‘조선약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기간은 1년이고, 과목은 약국방(藥局方:藥典)·물리·화학·약용식물 등이 추가되었는데, 강의내용이 새로운 학문이고 생소한 전문과목이라 공부하는 데 쉽지 않았다. 결국 30명의 수료생이 제2회까지 나와 이들에게는 약종상 허가의 우선권을 주었다.

그 뒤 일본인이 관여하게 되어 1918년 조선약학강습소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이를 흡수한 ‘조선약학교’가 생겨 2년제가 되고, 졸업자는 약제사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어 비로소 이호벽(李浩璧)·신경휴(申敬休) 등 한국인 약사가 탄생하였다. 그 뒤 1930년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되고, 광복 후에는 사립 서울약학대학이 되었다가, 1950년 국립서울대학교 약학대학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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