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보다 유효하고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창제되고 개선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보급이 확보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도의 기술과 함께 관리 및 사용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한 것이 특징이다.
약학의 또 다른 특징은, 약이 화학 등의 물질과학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질병치료나 예방목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생리학 · 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사회의 요구에 따라 생산되고 있는 상품으로서의 사회성 · 경제성도 지니고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약학은 물질과학이면서 동시에 생명과학적인 양면성 · 경계영역성 자연과학의 특성을 가진다. 바꾸어 말하면 약학이란 생리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을 취급하는 자연과학이다.
따라서 약학은 의약품이라는 물질을 창제, 생산하기 위한 약화학 · 생약학 · 분석화학 · 제조공학 · 제제학 등의 물질과학적 전문학과 함께 의약품의 올바른 사용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기 위하여 약물학 · 약제학 · 생화학 · 생리학 · 임상약학 · 위생화학 등의 생명과학적 전문학을 그 영역으로 하고 있다. 이 모든 전문학의 기초로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수학 등이 필요한 것은 모두 자연과학의 공통점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백제 때에 의사제도에 의학박사와 제약사가 분립되어 있어 의 · 약이 직업적으로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고는 하나, 현대과학적인 의약제도 이전에는 의학과 약학이 확연하게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약물학적 지식에 통달한 사람만이 의술을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학사와 약학사는 서로 얽혀 있으며, 약학의 발전만을 따로 분리하여 체계를 잡기가 어렵다.
또 우리나라의 의학이나 약학문화가 주로 중국에서 전래된 의학과 약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유의 의학이나 약학만을 추출하여 체계를 잡는다는 것도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이미 상고시대부터 단군신화에 쑥과 마늘 등 당시 중국의 약물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약물을 사용하였다든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 특산의 약물, 그 중에서도 특히 인삼 등이 중국으로 수출되었다는 중국의 기록 또는 고구려의 연금(鍊金)의 품질이 우수하여 약용으로 쓸 수 있었다는 중국의 기록 등으로 보아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근세에 와서 고려 및 조선시대의 향약발전의 역사라든지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설(四象醫說)에 입각한 약물분류 등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우리나라 특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특색 있는 발전을 줄거리로 하여 우리나라 약학의 연원과 발전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을 것이다.
원시시대의 약물발전은 사람이 지니고 있는 치료본능에 의하여 시행착오적인 경험으로 천연물 가운데에서 약물을 찾아내어 그 지식을 축적시켜 나간 것을 약학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의학의 창설자가 신화적인 고대 통치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의약 창시자는 개국신화의 환웅(桓雄)이라고 할 수 있다.
고기(古記)에 “환웅천왕이 태백산정의 신단수하에 내리시어 신시(神市)를 배포하고, 풍백(風伯) · 우사(雨師) · 운사(雲師) 들을 거느리시고 주곡(主穀) · 주병(主病) · 주형(主刑) · 주선악(主善惡) 등을 하시면서 무릇 인간 360여사(餘事)를 다스렸다.”라는 기록이라든지, 사람으로 전화(轉化)되기를 원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치성을 드리라고 한 기록으로 보아서 환웅이 백성들의 병을 주관하는 동시에 쑥 · 마늘 등을 이미 약으로 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서는 중국문헌에 한국의 특산약재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특히 고구려의 약방문이 당나라에 소개된 사실, 양(梁)나라의 도홍경(陶弘景)이 저술한 『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라는 책에 한국의 인삼이 중국에서 사용되었다는 기록 역시 도홍경의 『증류본초(證類本草)』 가운데 고구려산의 금설(金屑)이 연숙(鍊熟)되어 질이 좋아서 연금선방(鍊金仙方)에서 약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기록 등은 당시의 한국 고유의 약학발전의 구체적인 증좌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측의 문헌에 남아 있는 기록 가운데 삼국시대의 약품류가 소개되어 있는 것을 품목으로 나열하면, 인삼 · 백부자(白附子) · 오미자(五味子) · 여여(䕡茹) · 세신(細辛) · 토사자(菟絲子) · 관동화(款冬花) · 곤포(昆布) · 율(栗) · 조(棗) · 무이(蕪荑) · 황칠(黃漆) 등의 식물성 약재와 계(鷄) · 봉(鳳) · 맹조(孟鳥) · 우(牛) · 저(猪) · 마(馬) · 육축(六畜) · 호(虎) · 표(豹) · 비(羆) · 녹(鹿) · 장(麞) · 초(貂) · 호(狐) · 우(鰅) · 분(魵) · 면(鮸) · 선(鮮) · 사(魦) · 노(鱸) · 폐(○) · 낙(鱳) · 국(䱡) · 접(鯜) · 반어(斑魚) · 마륙(馬陸) · 혜(鱦) · 오공(蜈蚣) · 감접(紺蝶) 등의 동물 또는 금설 · 은설 · 온탕 등 금석류(金石類)와 온천에 이르기까지 소개되어 있어, 당시 우리나라의 약재물산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약물의 발전이 일본에까지 알려져 백제 또는 신라의 약학 전문가가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약학 수립에 기초가 된 사실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본초도 중국과 일본에 널리 알려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 가운데 신라의 골품제 신분계급의 사회생활양식상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제약(制約)이 적혀 있는데, 사용제한 내지는 사용금지를 하는 품목으로 공작 · 비취 · 자단(紫檀) · 침향(沈香) 등 남국물산이 들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와 같은 물품이 서역 또는 남양에서 교역, 유입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나라 때는 대식국 · 천축 · 곤륜 · 남양 각지와의 교역이 활발하였으며, 신라는 그와 같은 당나라와의 통교가 빈번하였으므로 신라도 남방 각지와 직접 교역을 하였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렌(Allen,H.N.)의 <외인거래한국연표 外人去來韓國年表>(조선학보, 제5집)에 당시 회교도가 신라에 정착하여 인삼 · 녹각 · 노회 · 장뇌 · 정(釘) · 안(鞍) · 도기 등을 교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일본에서 984년에 간행된 단바(丹波康賴)가 찬(撰)한 『의심방(醫心方)』 중에 백제의 약방문서인 『백제신집방(百濟新集方)』과 신라의 약방문서인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이 각각 인용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의 약학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된 것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며, 이 뒤를 이어 백제 · 신라에도 전파되었는데 교리 및 불전(佛典)만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의술 · 의서 · 약물 등의 인도불교의약학도 함께 도입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고려의 약학은 개국 초에는 신라약학의 계승이었기 때문에 당나라의 영향으로 시작되어 송나라 및 원나라의 문화를 섭취하였으나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고려약학을 발전시켰으며, 특히 대륙산 수입약재 대신 국산약재를 사용하여 전통성이 강한 향약방과 향약본초를 발전시킨 것을 특징으로 한다.
고려 때의 구급의방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을 비롯하여 『삼화자향약방(三和子鄕藥方)』 · 『향약간이방(鄕藥簡易方)』 · 『향약혜민경험방(鄕藥惠民經驗方)』 · 『동인경험방(東人經驗方)』, 조선 초기에 간행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등의 향약방서가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산실되어 직접 검토할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향약구급방』 및 『향약집성방』에 의해서 고려시대의 향약을 추측할 수 있다.
또는 송나라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化奉使高麗圖經)』에 의하여 고려약 및 물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의료기관으로서는 개국 초부터 왕의 약을 관장하는 상약국(尙藥局)이 있었고, 주 · 부 · 군 · 현(州府郡縣)의 향관직 중에 약점(藥店)이라는 직제가 있는 바, 지방의 의약을 관장하였던 곳으로 생각된다. 또 고려에 약국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일종의 의육기관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송의학의 전래, 송의인의 도래, 송제(宋帝)가 하사한 약재, 여원간(麗元間)의 의인의 내왕, 명제(明帝)로부터의 약재하사, 또는 아랍의 상선이 송나라를 거쳐 고려에 내항하여 그들의 문물을 들여오고 또 회회학예(回回學藝)의 영향을 받은 원나라 문화가 고려에도 전파되어 천문수학 · 역법(曆法)과 아울러 의학 · 약품 등의 신지식이 소개되는 동시에 몰약(沒藥) · 유향(乳香) · 용연향(龍涎香) · 소합향유(蘇合香油) · 목향 · 정향 · 안식향 등 남방산 약물이 고려에 들어온 사실도 있다.
이와 같은 교류를 통한 과정에서 고려약학이 수용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본초학을 개관하면 본초란 넓은 의미에서의 약물을 칭하며, 의방에 관계되는 동물 · 식물 · 광물 전체를 말하는 바, 고려본초의 의거자료문헌이 현존하는 것이 적어서 『고려사』를 중심으로 하고, 중국의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일한 현존 의약방서인 고종 때의 『향약구급방』 가운데 향약목이 있어 그것을 통하여 당시 각종 약물의 명칭 · 성미 · 채취방법 등을 알 수 있고, 특히 이두(吏讀)로 병기되어 있는 향약명은 당시의 동식물명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향약구급방』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을 통하여 고려 때의 본초학을 살펴보면 고종 때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간행된 것이지만 현존 간본은 태종 17년(1417)판이며, 그나마 국내에는 없고 일본의 국내성에 보존된 것만이 남아 있다.
그것이 고종 때의 원판 내용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말미에 있는 윤상(尹祥)의 발문(跋文)에 중간(重刊)이라고만 하였으며, 향약명이 고려 때의 것인 것을 보면 대체로 고종 때의 원판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권말의 <방중향약목초부>라는 제목 아래 당시의 향약 170여 종이 실려 있고 향약명과 간단한 상태 및 채취법이 설명되어 있어, 고려 때의 본초학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180종의 약재는 대체로 식물 · 동물의 순서로 배열되었고, 식물은 초 · 목 · 곡 · 채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각 종마다 오미(五味)와 사기(四氣)와 유무독의 약성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종에 따라서는 채취기 · 약용부 · 조제법 등이 간단하게 기재되어 있다.
이와 같은 향약본초는 고려 중기의 의약적 발전을 고찰하는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박물학 또는 고전어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더욱이 향약의 사용을 권장하게 한 것은 의약에 관한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는 기초가 되어 우리의 과학 내지는 일반 문화의 전통과 변천을 추구하는 데에도 특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조선의 개국 초기에 있어 향약장려책을 답습하여 진흥시킨 것은 고려의 후반기경부터 자라오던 의약자립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며, 구체적인 시책으로 향약의 생산 및 당약의 재배 등을 관장하게 하는 종약색(種藥色)이라는 부서(部署), 향약의 수납 및 향약에 의한 구료 또는 『향약제생집성방』을 비롯한 향약문서의 편집 송포를 실시하는 제생원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향약흥용책이 발전의 정상을 이룬 것은 세종 때 이르러서이다. 1450년(세종 32)은 조선문화의 융성기를 대표하는 시기이며 정치 · 경제의 확충, 문화의 융성을 이룩하였으며, 의 · 약학도 전무후무한 자주적 발전을 이룩하여 우리나라 의약의 최고봉을 이룬 시기이며, 의약학을 국정에 적합하도록 발전시키기 위하여 의 · 약학제도의 정비 확충을 비롯하여 의 · 약학의 장려책을 강구하였다.
동시에 향약의 자립을 위한 정책을 세워 의료의 자주화를 이룩하였다. 세종 때에 이르러 약재의 명나라 의존을 탈피하고, 자주적 약재공급책을 수립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약재수입에 따르는 국비유출을 방지함과 동시에 자국민의 병치료에는 자국민의 체질에 적합한 자국산 약재가 더욱 효과적이라는 의토성(宜土性)을 내세워 향약의 이용을 적극 권장하고, 향약의 재배와 증산 및 자급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문학자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향약과 당약의 이동(異同)을 검토하고, 향약으로서 당약에 대치할 수 있는 약재개발에 힘쓰는 동시에 전국에 걸쳐서 약재의 재생 및 재배상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결집하여 『향약본초』, 향약을 사용하는 의방서인 『향약집성방』, 향약의 분포실태조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또 약재 채취의 적정한 시기 및 방법에 관한 지침서인 『향약채취월령』을 간행하게 하는가 하면 희귀 수입약재인 용뇌 · 사향 · 주사 · 소합유 등의 사용을 제한시키는 동시에 남방계 약재인 안식향 · 영릉향 등을 제주도 등에서 대용품 개발 또는 재배시험 등을 통하여 자급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시책 중에서 당약과 향약의 비교 · 검토사실을 보면, 1423년(세종 5)의 『세종실록』에 62종의 향약을 가지고 명나라에 가서 시험한 결과 8종의 향약은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감정결과를 오늘날의 생약학적 지견(知見)과 대조할 때 앞에서 말한 8종의 생약은 오늘날에도 그 기원식물이 일정하지 않아 혼란이 생기는 것들이다.
이 처럼 당시의 감정이 오늘날의 과학적 견지에서 보더라도 정확하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 본초학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남방산약재로서 대체가 불가능하여 수입해야 하는 안식향이라는 약재를 안식향의 기원식물과는 전혀 다른 우리의 붉나무(옻나무과의 작은 낙엽 활엽 교목)의 수지(樹脂)로 대용한 사실이다. 어떤 경위로 붉나무의 수지를 안식향의 수지로 대용하게 되었는가를 약효학적으로 구명한다는 것은 오늘날 약학의 과제이기도 한다.
안식향뿐만 아니라 1425년 7월에 제주도 소산 약재진상법을 제정하고, 1438년 5월에 제주도산 영릉향을 당재(唐材) 대신 사용할 수 있음을 규정한 사실이 있다. 제주도가 본토에서 멀리 남해상에 떨어져 있어 지미(地味) · 기후가 본토와 다른, 특수한 지역이라는 데 착안하여 남방계 약재의 생산지로 특별히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424년 11월에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을 시켜 각 도 · 각 읍의 연혁, 산천의 형세, 풍속, 호구, 토산 등을 조사하게 한 것이 『세종실록』에 부기(附記)된 지리지이다. 그 가운데 궐공(厥貢) 및 약초의 조는 약재의 천산(天産) 및 재배상황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한반도에서 산출되는 생약자원의 분포상태를 목록으로 간행한 것이며, 식물성생약이 214종, 동물성생약이 46종, 광물성생약이 14종으로 도합 274종이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약재 중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품목인 곽향(藿香) · 파고지(破古紙) 등도 수록되어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은 향약장려책이 연산군 이후에 다시 쇠퇴하기 시작하여 향약을 버리고, 외래약재인 당재를 숭상하는 폐풍이 일어나 향약본초학은 민간의방 내지는 속방(俗方)으로 겨우 명맥을 잇게 된 사실은 우리의 약사상(藥史上) 일대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통한 고유 본초서로는 『향약집성방』 · 『향약채취월령』을 비롯하여 『동의보감』 탕액편, 『제중신편』 약성가, 『의종손익』 약성가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밖에도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의 향약명, 『산림경제』의 치약부, 『사의경험방(四醫經驗方)』의 물명(物名), 『급유방(及幼方)』의 본초 발명 및 식치(食治) 발명, 『본초류함(本草類函)』 · 『본초정화(本草精華)』 · 『유씨물명고(柳氏物名攷)』 · 『임원경제지』의 보양지 및 인제지(仁濟志) · 『방약합편』 등이 자료가 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향약본초서』 및 『향약방서』가 일본으로 반출되어 일본의 의약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이두어로 된 향약명마저 일본의 본초서에 이명(異名)으로 수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두향약명의 올바른 해독 없이 인용한 나머지 산장(酸漿)은 ‘꽈아리(叱科阿里)’라고 이두향약명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 본초서에도 그대로 표기되어 있거나 오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본초학이 일본 본초학에 준 영향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과학적인 실학이 일어남에 따라 우리의 독자적인 본초학 내지는 약학을 수립할 수 있는 시기였으나, 쇠퇴하여 가는 국세와 사대사상의 틈바구니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한 채 겨우 명맥을 유지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뜻있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농수산학적 또는 박물학적 본초서가 간행된 것은 그런대로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본초학적 기술개발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탁월하였는가를 실증할 수 있는 것의 하나로 고려인삼의 개발을 들 수 있다. 인삼은 전한대(前漢代) 후기부터 『급취편(急就篇)』 · 『춘추위운두추(春秋緯運斗樞)』 · 『예위두위의(禮緯斗威儀)』 · 『사기(史記)』 대창공전(大倉公傳) 등에 그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적어도 2000년 전에 인삼이 중국에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홍경의 『명의별록(名醫別錄)』에 산시성 노안부의 타이항산맥의 상당(上黨)에서 산출되는 상당삼이 품질이 좋아 고구려삼 · 백제삼 · 신라삼보다 우수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면 당시 중국도 인삼의 주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를 인삼의 종주국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것은, 중국은 인삼을 남획하고 관련 정책 및 재배기술이 미흡하여 인삼의 생산이 쇠퇴한 데 비하여 한민족은 인삼의 재배·수치(修治) 등의 기술을 고도로 발전시켰기 때문이지 풍토가 인삼 재배에 적합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5년 만인 1596년(선조 29)에 태의 허준(許浚)이 선조의 명을 받들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 · 김응탁(金應鐸) · 이명원(李命源) · 정예남(鄭禮男) 들과 함께 국(局)을 설치하고 찬집하게 되었는데, 아직 완성을 보기 전에 정유재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선조가 다시 허준에게 명하여 단독으로 그 찬집을 완성하게 하였는데, 전후 10년에 걸쳐 1610년(광해군 2)에 완성되어 1613년에 간행된 의약서이다.
25권 25책으로 되어 있으며, 편찬이 실사구시 · 공리실용적으로 되어 있고, 내경편(內景篇) · 외형편 · 잡병편 · 탕액편 및 침염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중 약물학 본초서에 해당되는 탕액본초를 분석하여보면, 당시는 아직 1590년에 명나라에서 간행된 『본초강목』이 도입되지 않아 『동의보감』에 인용되지 않고, 주로 중국의 『경사증류대관본초』(증류본초)가 기준이 되어 있고 명나라의 의서인 『의학정전』 · 『의학입문』 · 『단계심법부여』 · 『식물본초』 등을 가미하고 있다.
만약 『동의보감』의 탕액본초가 이와 같은 원전만을 근거로 한 것이라면, 독창성을 논할 나위도 없겠으나 인용출처를 속방이라고 표시한 기재가 90종의 약물에서 볼 수 있듯이, 이는 허준 또는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던 본초학적 지견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으로 본다.
고금을 막론하고 세력권의 영향력을 미치는 대국의 학설에 대하여 이와 같은 속설을 첨가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학적 소신과 자주성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90종의 약물에 대하여 첨가된 속설은 명칭 및 기원에 관한 것이 14건, 효용에 관한 것이 18건, 성상(性狀)에 관한 것이 45건, 감별법에 관한 것이 6건으로 되어 있으며 산지를 보더라도 『세종실록』 지리지 이후의 새로운 지견을 망라하고 있으며 오늘날의 산지조사와도 잘 부합되는 내용임을 볼 때 그 정확성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수입생약의 국산화를 위해서 감초 · 마황 · 영릉향 · 안식향 등의 이식시험 또는 대용약물 개발 등의 결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속설이 첨가되어 있는 약물들도 있다. 『동의보감』이 출간되자 당시의 일본 본초학자들이 탕액본초에 주목하여 여러 가지 서적들을 출간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탕액본초가 얼마나 주목되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사람을 체질에 따라 4종의 체형으로 분류하고, 체형별 약성관(藥性觀)을 내세워 각 체형에 해당되는 요약(要藥)을 발표한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약성론(四象藥性論)은 우리의 의 · 약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의설약론(醫說藥論)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마는 경사자집(經史子集) 및 의약 · 복서(卜筮)에 능통하여 종래 한의학의 용약법이 육경병(六經病: 太陽病 · 少陽病 · 陽明病 · 太陰病 · 少陰病 · 厥陰病의 6종)의 병명증목에 따라 투약하는 정설에 의의(疑義)를 품고, 독창적인 사색과 임상연구를 거듭한 결과 드디어 환자의 체질명목에 따라 약물을 선택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약내국리어인(藥乃局理於人)’이라는 전인미발(前人未發)의 용약론을 착상하기에 이르렀다.
즉, 사람을 외부상태(용모 · 기육 · 체격 등), 내부상태(폐 · 간 · 비 · 신 등의 장기), 심리상태(심정 · 성정 · 특징 등) 및 소질 등을 감안하여 4형의 체질로 분류하여 사상(四象)이라 하였고 적용하는 요약이 달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음양오행설의 천리적 공론이 아닌 병자의 체질에 중점을 두어 동일한 질병일지라도 병인의 체질에 따라 치법을 달리한다는 원리는 현대의약학적 지식으로도 수긍되는 점이 많다.
이와 같은 사상약성론을 저술한 것이 『동의수세보원』이며 이제마가 1893년(고종 30)에 착수하여 다음해에 탈고하고 출간된 것은 그가 죽은 다음해인 1901년(광무 5)이다. 성명론 · 사단론 · 확충론 · 장부론 · 의원론 · 광제설 · 사상인변증론의 7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상의약론이 제창된 지 오래이나 아직 약리학적으로 과학화되지 못한 채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체질별 요약의 성분 또는 약리작용의 이동(異同)을 구명하여 사상체형의 정당성 여부가 과학적으로 가려져야 할 것이다. 사상인의 이와 같은 체형분류법이 현대의학적 계측으로 어느 정도 가능한지는 속단할 수 없으나, 형식상으로는 4혈액형(A · B · AB · O)이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의 4체액설 등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서양의 체형론이 주로 생리와 병리설에 그치고 있으나, 이제마의 사상론은 질병치료에 구체적으로 응용하여 약물 및 식물을 분별하고 있어 설과 용법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태양인 요약의 종류가 다른 체질인에 비하여 적은 것은 태양인이 사상인 중에 그 출현수가 가장 적으며 적응력도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사상유형별 출현빈도는 인구 1만명 가운데 소음인 5,000명, 소양인 3,000명, 태음인 2,000명, 태양인은 3, 4명 내지 10명 정도라고 한다.
사상의약론파는 아니지만 전통 중국 의약학의 금과옥조적 용양법에 대하여 이규준(李圭晙)은 대담하게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용약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의감중마(醫鑑重魔)』 · 『소문절요(素問節要)』 등의 저서를 남기고 있으며, 중국의 주진형(朱震亨)의 설에 반대하여 연령의 노약에 구애됨이 없이 온혈제에 속하는 인삼 · 부자 등의 약을 애용하였다.
이와 같은 전통약학의 기반 위에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도입된 개화기의 약학이 1세기에 걸쳐서 꾸준하게 성장하여 오늘날 세계적 수준의 현대약학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현대약학을 토착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우리의 독창성 있는 약물개발을 통하여 한국약학의 특색을 과시하여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약학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라고 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길이 조상들의 향약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다.
근대 약학이 서양으로부터 도입된 것은 조선시대 말기에 서양의약품이 이른바 양약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부터이지만 약학교육기관으로서는 1915년의 조선약학강습소가 최초이다.
오늘날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인 이 강습소는 3년 뒤인 1918년에 전문자격자를 양성하는 조선약학교가 되었다가 1930년에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는데, 이 사이의 11년이 우리나라의 근대 약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광복 이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이후의 재건기를 거치는 동안 약학과 약에 대한 사회적 · 산업적 요구가 커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 약학교육기관도 늘어나게 되었다.
즉, 1950년대에 2개에 불과하였던 약학대학이 1987년 현재 20개로 10배나 늘어나게 되었다. 교육내용도 발전을 거듭하여 처음에 약학과 단과이던 것이 오늘날에는 약학과 · 제약학과 또는 위생제약학과 등으로 분과되어 학생들을 교육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발전과정을 거쳐온 오늘날의 약학방법론은 무엇인가를 전술한 바 있는 약학의 특성, 즉 생리활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의 창제, 질병치료와 예방 등 생명현상조절에의 용약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약의 창제는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물로부터 어떤 성분을 추출, 분리하여 그 화학구조를 구명하고, 그 생리활성을 확인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를 위하여 천연물과학이 약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이 천연물과학은 필연적으로 생약학 · 식물화학 · 분석화학 및 유기화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한편 새로운 의약품을 천연물로부터 찾아내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기존의 생리활성물질로부터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디자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즉, 화학구조와 생리활성물질간의 상관관계를 도출하고 이로부터 더 바람직한 생리활성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하여 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서 약화학 · 합성화학 · 제조공학 · 발효학 · 유전공학 등이 약학의 영역에 도입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어떤 생리활성물질이 창제된 뒤 인체에의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인되고 나면 비로소 이 물질은 의약품이라는 물체로 된다.
물체로서의 약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근년에 물리화학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각종 물성(物性) 측정의 기계화 · 자동화 등이 가능해졌고, 유기화학과 생화학 등의 연구방법이 획기적인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
또 약을 제형(劑型)이라는 물체로 생산, 가공, 취급하는 이론을 위해 제제공학 · 제제학 · 약제학이 오래 전부터 약학의 영역에 도입되었다.
이상에서 약의 창제에 필요한 물질과학적 방법론을 소개하였으나,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약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하여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을 창제할 때에도 생명과학의 측면에서 정보를 활용해야 한다.
이 때문에 물질을 창제할 때에도 생리학 · 생화학 · 약효학 · 독성학 · 미생물학 등의 생명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이 다른 물질과학과 차이 나는 약학의 특징이 될 것이다.
두번째로 생명과학적 측면에서의 약학의 특성은 질병치료나 예방을 위하여 의약품을 사용하는 용약이 있다. 유효하고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약리학 · 독성학 · 약제학 등이 필요하게 되었고, 다시 이를 위하여 생리학 · 생화학 · 미생물학 · 체내동태학 등의 기초학문이 도입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과학적 특성을 가장 실감시켜 주는 학문은 임상약학이다.
이 임상약학은 이제까지의 약학이 지나치게 물질과학에 치중해 왔다는 반성, 그리고 이제는 환자 지향의 생명과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자각으로부터 미국 등지에서 최근 발전되기 시작한 학문이다.
국내에의 도입역사가 짧은 만큼 그 개념도 아직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이 임상약학을 통하여 약학이 본격적으로 의학과 교류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생명과학으로서의 약학을 설명할 때에 특기할만한 것은 최근 생명과학 분야, 특히 분자생물학의 발전에 힘입어 생물계 학문의 방법론이 약학에 눈부시게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래의 기술과학적 성향에서 벗어나 약의 작용과 체내움직임을 분자수준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분자생리학 · 분자약리학의 도입이 더욱 중시되었다. 이에 따라 약학의 이론과학화는 더욱 가속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약학의 생명과학적 측면을 고찰할 때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분야가 위생학 분야이다. 이는 인간의 환경 또는 의식주와 생명현상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약학의 고유한 학문 분야로 발전되어 왔다. 이 분야의 완성을 위해서는 미생물학 · 면역학 · 독물학 · 환경위생학 · 식품위생학 등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 분야는 질병치료보다는 예방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상에서 약학의 자연과학적인 특성을 물질과학적 특성, 생명과학적 특성의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하였다. 이제는 약사라는 전문기술인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약학에 관하여 한마디 하자면,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약은 그 사용과 관리에 엄격한 규제가 필요하고 따라서 약사라는 전문기술인만이 취급하게 되어 있다.
이 직능은 약제의 조제 · 관리 · 평가가 주내용으로, 이를 위하여 조제시험법 · 약사법 · 약국관리학 · 경영학 등의 전문학이 약학에 도입되었다.
이 밖에도 보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식품 · 향장품과학 등도 약학의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은 약학의 특성을 종합하여 보면, 비로소 약학이 왜 종합과학으로 불리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약학은 최근 국내외 상황의 영향을 받아 급격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발전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물질과학과 생명과학에 중점을 두고 새로운 신약을 창제해 내려는 자연과학의 방향이다. 이 방향은 물질특허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과학계가 약학계에 거는 기대이기도 하기 때문에, 앞으로 더욱 발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 하나의 방향은 보다 효과적으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직능인으로서의 약사교육방향이다. 물질 지향의 약학에서 환자 지향의 임상약학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소리는 점점 커질 것이고, 이에 따라 교육내용도 발전해 나갈 것이다.
약학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류의 건강증진에 있다면, 어떤 물질이 어떻게 생리현상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자연과학적 측면에서의 발전과 함께 임상에서 약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전문직능 측면에서의 발전도 우리 나라 약학의 미래에 주어진 당면한 사명이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약학이 더욱 심도 있고 균형잡힌 발전을 거듭하여 인류건강에 크게 기여하리라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