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거란의 2차 침입때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 적을 격퇴하다 죽은 충신 양규(楊規)이다. 아버지의 공으로 교서랑(校書郎)에 제수되었고 1039년(정종 5) 대부소경(大府少卿)으로 서북로병마부사(西北路兵馬副使)가 되었다.
다음 해 안북대도호부부사(安北大都護府副使)가 될 때 좌복야(左僕射) 최충(崔冲)이 아뢰기를 “대춘(帶春)은 뜻을 세움이 기발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에 익숙하니 만일 변방의 걱정이 있을 때 이 사람이 아니면 가히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마땅히 내직(內職)에 보하지 마소서.”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한다.
1047년 서북로병마사(西北路兵馬使)로 있을 때 관할지역의 연주방어(連州防禦) 장리(長吏), 군민(軍民) 등 800여 명이 “방어부사(防禦副使) 소현(蘇顯)은 부임 이래 농상(農桑)을 장려하고 백성을 보살피고 구휼(救恤)하여 실적이 현저하다 하므로 이에 아뢰나이다.”하니 받아들여 상서이부(尙書吏部)로 하여금 규제에 준하여 양용(量用)하도록 하였다. 뒤에 직문하성 위위경(直門下省衛尉卿)에 이르렀는데, 병이 나니 조회하는 것을 면하고 다만 겸관(兼官)으로 일만 보게 하였다.